등록 : 2014.05.05 18:47
수정 : 2014.05.05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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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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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의 충격을 목격하면서, 몇해 전 내 수업을 들었던 한 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첫 시간에 나는 대학이 무엇이며, 이곳에서 무엇을 할 것이며, 졸업 후에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으면 좋겠는가에 대해 피력하는 시간을 갖곤 한다.
대개의 학생들은 이런 질문 앞에서 명쾌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히지 못한다. 엉뚱하게도 그들은 자신이 어떤 전형으로 대학에 합격했는가를 밝힌다. 수시 전형으로 들어왔다, 논술 전형으로 들어왔다, 국제화 전형으로 들어왔다. 전공은 예체능이지만, 자신은 실기가 아닌 수능 전형으로 들어왔다는 식이다.
말은 안 하지만, 나는 이 다채로운 입시전형을 피력하면서 자기를 소개하는 풍경이 일종의 학력자본을 둘러싼 ‘구별짓기’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같은 학과 학생이라도, 전형의 성격에 따라 학력 차가 존재하고, 전형방식의 차이가 능력의 차이라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제법 있는 것이다. 이것을 단순히 경쟁만능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입시성적을 제외하고는 자기정체성을 해명할 수 없는 현실의 반영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자못 당당한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하던 한 여학생이 자신은 대구 출신이라고 소개했다. 한데 그녀는 언뜻 보아도 목소리가 안정되지 못해 거의 울듯이 떨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 그 떨림이 낯선 다수 앞에서 한 내성적인 학생이 스스로를 소개해야 하는 어색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맡은 수업은 학생들을 모둠별로 구성해, 한 학기 동안 자원적 현장활동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학기 말에 포트폴리오를 제출하는 것이었다. 이 수업은 학교현장을 벗어나 사회현장에 깃들어 있는 의제들을 학생들이 직접 조사 연구하고, 현장활동을 통해 해당 문제의 복잡한 맥락을 이해한 후, 대안과 비전을 학기 말에 발표하는 수업이었다.
현장활동 계획을 발표하는 단계에서 이 학생이 소속된 조는 ‘대구 지하철 참사’에 대해 다뤄보겠다고 말했다. 특히 참사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하고, 이후 어떤 제도적 대안이 실행되었는지를 비판적으로 검토해보겠다는 것이다. 나는 현장활동의 핵심 장소가 대구이기 때문에, 과연 한 학기 동안 서울과 대구를 오가면서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는가 물었는데, 자신이 참사의 피해자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말했다.
과연 중간발표를 하는 날, 그 학생이 속한 조원들은 일반 학생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피해자 면담과 참사 이후 공사와 정부 당국이 제시했던 대안들, 그리고 피해자들의 트라우마를 치료했던 의사와 상담사들의 의견들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하면서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했다. 하지만 그랬던 그녀가 피해자들의 현재 상황을 말하기 시작하면서, 침묵 끝에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 흐느낌은 고통의 제어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나타나는 극도의 혼란감을 동반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학생은 지하철 참사에서 살아남은 ‘생환자’였다.
중간발표를 마치고 이 여학생은 수업에 참석하지 않았다. 메일을 몇 차례 보냈지만 연락이 없었고, 출석일수 미달 탓에 에프(F)학점을 주었다. 그러나 이 학생의 안부가 늘 궁금했다. 그 후 학교에서 우연히 마주친 적이 한번 있는데, 표정이 밝아 안심했다.
대구지하철 참사는 이 학생에게서 고요한 날들을 앗아갔다. 일상의 밝은 표정은 내면적 혼란을 이겨내기 위한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그러나 의지만으로 고통의 트라우마가 간단하게 봉합되지는 않는다. 세월호 참사에서 생환된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참사에서 어른들이 범한 가장 큰 범죄는 ‘고요한 날들’을 이들에게서 영원히 뺏어버렸다는 사실이다. 그 어떤 것으로도 ‘고요한 날들’은 배상될 수 없다.
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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