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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5.26 18:44 수정 : 2014.05.26 21:51

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세월호 참사는 거대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가장 명백한 충격은 아마도 국가의 허구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는 점에 있다. 세월호의 침몰 이후 해경과 해군은 단 한명의 생존자도 구조하지 못했다. 참사의 초기 단계부터 ‘공공의 무력’은 왜 존재하는가 하는 물음이 던져졌다.

1789년 프랑스 의회가 공표했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제12조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들어 있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 보장은 공공의 무력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그 무력은 그것을 위탁받은 자들의 특수한 유용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만인의 이익을 위해 설치된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공공의 무력은 “시민의 권리 보장”에서는 무능하고 “특수한 유용성”을 위해서는 기민하다.

시민의 권리란 무엇일까. 1776년에 공표된 미국 독립선언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조물주는 몇 가지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다.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인간은 정부를 만들었으며, 이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인민의 동의에서 나온다.”

세월호 참사 과정에서 한국 정부와 그것의 핵심인 공공의 무력은 시민의 생명, 자유, 행복 추구와 같은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보장하지 못했다. 그럴 경우 미국의 독립선언서는 시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또 어떤 형태의 정부든 이런 목적을 파괴할 때에는 언제든 정부를 바꾸거나 폐지해 인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가져올 수 있는 원칙에 기초를 두고 그런 형태로 기구를 갖춘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는 것은 인민의 권리이다.”

세월호 참사는 단순한 재난이 아니라 시민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이 파괴된 국기문란 사건이다. 미국의 독립선언서가 해결책에 “정부를 바꾸거나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벌써 수백년 전에 했던 것을 떠올리면, 민주주의의 ‘원칙’ 면에서는 오늘의 박근혜 정부의 처방처럼 ‘해경 해체’가 아니라 “정부를 바꾸거나 폐지”하는 것이 한국도 채택하고 있는 미국식 민주주의에 충실한 해법이다.

시민들에게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가 흔쾌하게 수용되지 않는 것은 “정부를 바꾸거나 폐지”하는 것에 준하는 진정성과 책임정치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많은 시민들은 후임 총리에 검찰 출신 인사를 지명하고 권위주의의 상징인 청와대 비서실장이 유임된 데서 그것을 본다. 이러한 검찰 출신 권력 핵심의 투톱 시스템은 “밀리면 죽는다”는 정권의 오기를 보여주는 것 같아 음산하다.

물론, 시민들이 임박한 지방선거를 통해 정권의 변화를 압박하는 일은 가능하다. 하지만 선거제도가 민주주의의 기본원리에 충실한 ‘응징투표’를 정의롭게 실현하는가는 별도의 문제다. 참사 이후 일부 정부 관료와 참모진, 목사, 교수, 언론인 등의 유족에 대한 뒤틀린 발언과 정신구조는 충격적이지만, 그런 뒤틀림까지도 ‘선거’라는 제도를 통해 ‘과대대표’될 수 있다는 게 대의제의 딜레마다.

이 딜레마를 어떻게 풀 것인가. 시민의 ‘자기통치’ 역량을 강화해 국가권력을 일단 ‘중성화’시키는 게 필요하다. 그러나 시민주권의 국가 ‘양도’에 기초한 민주주의 이론 자체가 ‘허구’일 수 있음도 성찰해야 한다. 국가에 양도한 주권이 시민들에게 다시 ‘회수’될 수 없는 것이라면, 헌법 제1조의 주권재민 원칙은 다만 ‘표어’에 불과한 게 아닐까. 표어화된 헌법 제1조를 어떻게 현실로 소환할 것인가. 주권재민을 현실화하기 위한 고도의 사고실험과 행동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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