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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6.01 18:12 수정 : 2014.06.01 18:12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실장

4월 중순 이후 우울하게 보내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밑바닥을 드러낸 이 사회 권력층의 ‘꼬라지’도 그 원인이긴 하지만, 단지 ‘저들’이 문제라면 분노하고 욕하면 되는 것이지, 사실 우울해할 것도 없다. 그런데도 계속 마음이 무거운 이유는 ‘저들’만이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를 자꾸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무심하게 흘러가는 ‘일상의 시간’이며, 무엇보다도 거기에 나도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회 전체를 뒤흔든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나는 강의계획서에 있는 대로 강의를 진행했다. 물론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가적인 것이었다. 주말에도 추모의 시간을 따로 가지는 일도 없이 강의 준비를 하거나 마감이 가까운 글 같은 것을 쓰면서 지냈다. 가라앉은 세월은 계속 나를 붙잡고 멈추게 하려고 했지만, 나는 예정된 일상의 시간이 탈 없이 흘러갈 수 있도록 바쁘게 지냈다.

시급이 아닌 분급을 받고 일하기도 하는 이 사회에서 권력은 “가만히 있으라”고만 하지는 않는다. 권력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가만히 있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두려워한다. 자본가든 정치인이든 우리의 활동에 기생하는 이들은 우리가 멈추는 것을 무엇보다도 두려워한다. 그들의 일차적 명령은 “가만히 있지 말라”다. 5월 초반에 대통령까지 나서서 소비를 부추긴 것도 우리가 소비자로서 비교적 가만히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삶의 거의 모든 부분을 삼켜버린 자본주의 체제는 그만큼 우리 삶에 의지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우울증에 빠져 있으면 이 체제는 굴러가지 못한다. 그러니 권력의 초미의 관심사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는 영역과 가만히 있어야 되는 영역을 나누며 조절하는 일이 된다.

이 사건을 ‘세월호’라는 고유명사로 부르는 것의 위험성은 여기서 생긴다. 나를 포함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월호라는 배 자체와는 거의 무관하기 때문이다. 세월호, 단원고, 청해진해운과 같은 고유명사를 부각시키는 일은, 마치 그들을 기억하려는 작업처럼 보여도 사실은 망각을 위한 준비 단계로 봐야 한다. 청와대 대변인 입에서 나온 “순수 유가족”이라는 말이 단적으로 보여주듯이, 지금 이 사회를 유지하려는 이들이 노리는 것은 우선 이 문제를 특정 소수의 문제로 한정해 나머지 이들을 ‘일상’으로 복귀시키는 것이다. 그것만 성공한다면 나머지 일은 그야말로 시간이 해결해준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와 같은 ‘고유명사화’에 저항하면서 기억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 고유명사를 빼고 이 사건을 ‘4·16’이라고 부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을 것 같다. ‘4·16’이라는 시간은 결코 ‘그들’만의 시간이 아니었다. 그 충격으로 일상이 깨지면서 우리 모두가 당사자가 됐다. 우리는 세월호를 공유하지는 않았지만 ‘4·16’은 분명히 공유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죽은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느낀 우리 자신의 붕괴감이다. 그 암담한 심정, 슬픔, 분노가 ‘4·16’이다.

나를 포함해 적지 않은 사람들이 느끼는 우울감은 몸속에 있는 ‘4·16’이 흐르는 시간에 저항하는 데서 생긴다. 그러니 이 우울증은 쉽게 치유되지 않을 것이며 쉽게 치유되어서도 안 된다. 누구는 망각을 요구하겠지만 그럴수록 우리의 우울증은 더 깊은 곳으로 잠적할 뿐이다. 2014년 4월16일이 다시 돌아오진 않지만, 16일은 한달에 한번, 4월은 1년에 한번 꼭 돌아온다. 시간은 흘러도 멈춘 세월은 다시 돌아온다. ‘4·16’은 과거에 대한 기억이자 미래에 대한 약속이기에.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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