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6.08 18:15
수정 : 2014.06.08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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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국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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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비정하다. 시간은 영화보다 더 기괴한 침몰사고도 일상화시키고 익숙하게 만든다. 가슴 아픈 사연에 하루에도 몇 번씩 눈물을 훔치지만 우리의 욕망을 상징하는 주가는 멀쩡하게 오르고 선거는 예정대로 치러진다. 우리는 이제 추억 속에서만 누군가를 온전히 소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유일한 위안으로 삼아야 할지도 모른다.
지방선거가 끝나면서 선거가 권력 획득의 지배적인 게임의 규칙으로 자리잡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치열하게 경쟁했던 선거 결과에 어쨌든 승복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선거에는 다양한 표 계산의 방식이 있지만 어느 선거에서나 공통된 원칙은 표를 많이 얻은 사람 또는 다수의 지지를 확보한 정당이 승자가 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 규칙을 다수결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 다수결의 원칙을 따를까?
다수의 의사가 정당성을 갖는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고대나 중세에는 한 사람의 철인 왕이나 경륜 있는 귀족들이 권력을 갖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다수의 의사를 따르는 것은 위험하거나 현명하지 못한 일로 간주되었다. 다수의 의사가 권력의 정당성의 원천으로 등장한 것은 사상사에서는 로크 이후의 일이고 현실에서는 19세기 이후 민주주의가 정착한 사회에서이다.
선거를 통해 권력의 향방을 결정한다는 것은 사회 구성원 모두가 폭력적인 문제해결 방식의 배제에 동의했다는 것을 뜻한다. 즉, 물리력을 동원한 권력 쟁취는 서로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는 것이 선거의 대전제이다. 그리고 그 선거의 규칙으로 우리는 다수 결의를 받아들인다. 예컨대, 선거 결과 열 명 가운데 여섯 사람이 동쪽으로 가기를 원하고 네 사람이 서쪽으로 가기를 원했다면 우리는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동쪽으로 가기로 결정하고 소수의견에 속했던 네 사람 역시 자신들의 의견을 포기하고 동쪽으로 따라간다. 그런데 왜 네 사람은 단지 소수라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포기해야 할까? 우리가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소수의 포기에는 적어도 두 가지 규범적 조건이 전제되어 있다.
첫째는 게임의 규칙이 공정해서 이번 선거에서는 비록 내가 소수에 속하지만 다음 선거에서는 내가 다수의 일원이 될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전제이다. 만약 이번 선거뿐만 아니라 앞으로 10년 후, 20년 후, 아니 평생 단 한 번도 다수의 일원이 되어 자신의 의사가 대표될 가능성이 구조적으로 없다면 누구도 다수결의 원칙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둘째는 비록 소수의 일원으로서 내 의사를 포기할지라도 다수가 나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애써줄 것이라는 다수에 대한 신뢰의 전제이다. 즉, 소수가 선거 결과에 자발적으로 승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의견을 포기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두터운 사회적 연대가 다수와 소수 사이에 존재해야 한다. 이런 연대감 없이 소수의 기계적 포기를 강요하는 현실은 패자의 좌절과 절망감을 키워 정치공동체의 미래를 어둡게 만든다.
결국 다수결의 원칙이 의미 있기 위해서는 공정한 게임의 규칙과 다수와 소수 사이의 신뢰라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 되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예정대로 치러지는 선거와 절차적 정당성을 갖춰 가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대해 여전히 알 수 없는 불만을 느끼고 있다면 그 이유는 우리 사회의 절차적 민주주의 이면에 전제되어야 하는 사회적 연대의 부재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 사회는 각자 자신의 이해를 위해 전투적으로 투쟁하는 가운데 소수의 권리를 보호해 주기 위해 애쓰는 다수가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심각한 사회적 연대의 위기를 겪고 있는 것이다.
김남국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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