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4.06.23 19:00 수정 : 2014.06.24 10:27

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세월호 참사의 충격은 잊을 수 없다. 잊어서도 안 된다. 잊는다면 사람이 아니다, 라고 나는 말해 왔지만, 그 결심은 점점 약해지고 있다. 이미 치러진 지방선거와 앞으로 온다는 재보선을 앞두고 경합하는 두 정당은 세월호 참사와 무관하게, 또다시, “한번만 도와 주십시오”라고 호소할 것이다. 대통령을 지키겠다, 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등 내세우는 이유는 여럿일 것이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면 속았다, 는 명백한 탄식의 상황과 조우하겠지.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참사는 일상이다. 정권 출범기 윤창중씨가 대변인으로 임명된 이후부터 계속되는 인사 참사는 이제는 고질이다. 대선에 개입하고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유출하는 등 국정을 문란하게 했던 정보공안기관들은 여전히 건재하다. ‘땡박뉴스’나 ‘땡전뉴스’ 시대로 진작 회귀했던 방송 역시 변한 게 없다. 전교조에 대한 합법성 박탈이라는 사법부의 판결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에서는 유례없는 일이다. 열거하자면 끝이 없는데 최근에는 전방지역에서 총기 참사까지 발생해 민심이 뒤숭숭하다. 국정문란의 당사자인 김기춘 비서실장만 건재한 것 같다.

인접국도 참사를 초래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있어 일본 정부와 군의 조직적 관여와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담화를 아베 내각은 희화화시켰다. 일본인 납치의 폭력성을 근거로 격렬한 혐한반도 감정을 증폭시키고 있으면서도, 일제하 자행된 난징대학살과 위안부 강제연행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해석에 의한 증거인멸과 부정을 꾀하고 있으니, 이것은 아시아의 평화와 연대를 갈망하는 시민적 정의에 대한 참사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가. 나는 이런 의문을 자주 던져보고 있다. 아직 명쾌하게 답을 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명백하다. 그것은 내가 항상 잊어왔기 때문이다.

망각의 이유는 여럿일 것이다. 첫째, 나는 분주하다. 생활의 압력이 ‘먹고사는 것 바깥’의 문제에 대해 사유하는 것은 사치라고 속삭인다. 둘째, 기억하는 것의 고통 때문이다. 참사의 고통을 거듭 상기하게 되면 무력감이 엄습한다. 한 개인의 힘으로 은폐된 참사의 진상을 밝히는 것은 불가능하다. 셋째, 이 세계를 작동시키는 힘과 권력이 ‘정의’와는 무관하다는 식의 체념 때문이다. 넷째, 뉴스가 뉴스를 덮고 참사가 참사를 뒤덮다 보니 ‘공황장애’나 ‘인지부조화’에 근접한 조울상태에 자주 빠지게 된다. 제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마음은 찢기고, 머리는 터질 것 같고, 몸은 둔해지는 것이다. 나만 그런가.

나는 항상 잊어왔다. 간신히 가능한 일상의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그래 비타협적으로 나는 항상 잊어왔다. 그렇게 잊는 것을 체화하다 보니, 제아무리 충격적인 참사가 도래해도, 내 일상만 위협하지 않는다면, ‘셧 다운 플리즈’라는 권력의 요청에 기막히게 잘 순응했던 것이다.

요즘엔 생각이 좀 변했다. 세월호 참사 직후 친구와 고민을 나눈 이후부터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형, 80년대 민주화운동 역시 광주학살의 진상을 규명하라는 데서 출발한 것 아닙니까?” 우물쭈물 나는 “그렇죠.” 눈썹 불끈 그는 “세월호 참사라는 것도 우리가 그 진상을 모르니까 이렇게 비통해하고 있는 게 아닙니까?” 눈동자 커진 나는 “그렇죠.” 눈알이 충혈된 그는 “명백하게 진상규명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로부터 모든 문제가 풀린다고 나는 생각해요.”

그렇다. 모든 사건에는 시작, 중간, 끝이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이 직면한 참사에는 ‘스토리’는 있는데 ‘플롯’이 없다. 투명한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 그래야 이 무수한 참사와 집단적 기억상실증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조희연·이재정·이청연 교육감 '교육 변화의 열망'을 나누다 [한겨레담 특집]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세상읽기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