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6.25 18:30
수정 : 2014.06.25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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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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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말하듯 선거는 구도 싸움이다. A와 B 중에 어느 쪽이 나으냐로 선거가 치러지면 지지율이 높은 쪽이 유리하다. 반면, 구도가 A 대 비A의 대결이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A의 지지율이 만약 50%, 즉 과반 이하라면 A에 반대하는 비A 또는 반A의 몫이 더 크기 마련이다. 이런 구도에서는 비A 또는 반A를 얼마나 결집·동원하느냐가 관건이다.
A에 대한 반감이 워낙 깊고 넓다면 결집·동원의 부담이 적어진다. 응징하거나 심판하기 위해서라도 투표장에 나갈 동인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2004년 총선이나 2007년 대선의 경우가 적절한 예다. 2004년엔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대한 역풍이 거세게 불었고, 2007년엔 ‘닥치고 바꿔’의 열망이 뜨거웠다. 미국의 예로는 1932년 대선을 들 수 있다. 1929년 공화당 집권 시기에 닥친 대공황 때문에 정권교체가 피할 수 없는 대세를 형성했고, 실제로 민주당과 루스벨트는 손쉽게 승리했다.
집권세력에 대한 반감이나 분노가 워낙 강해 대안세력의 능력은 아예 고려하지 않을 정도, 즉 그 임계점이 어디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게 심판선거의 난점이다. 때문에 여론조사에서 보이는 반감 분위기나 체감되는 분노 정서 때문에 집권세력에 대한 반대만으로 선거를 치르려고 한다면 실망스러운 선거결과를 얻기 일쑤다. 야당의 역할이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에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대에만 머물면 안 된다는 뜻이다. 왜 아닌지를 설명해야 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반대라는 부정적 스탠스가 긍정적 에너지를 갖게 된다. 비유하면 이런 얘기다. 누군가 싫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자동적으로 좋아지는 건 아니다. 누군가 싫어지면 다른 사람을 쳐다보기는 하겠지만 그 시선이 곧 애정은 아니다. 관심을 애정으로 바꾸려면 그 나름의 매력이 있어야 한다.
지난 6·4 지방선거에서 세월호 참사는 선거 프레임을 바꾸어놓았다. 정당지지율을 기준으로 40%의 새누리당과 20%의 새정치민주연합 간 대결이 아니라 40%의 새누리당과 그 나머지 60%의 대결 구도가 됐다. 덕분에 새정치연합은 심판 프레임을 가동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선거결과를 보니 심판 프레임으로는 60%를 충분히 결집·동원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증명됐다. 그것을 추동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정도로 분노 게이지가 높지 않다면 관건은 대안의 존재다. “대안을 정의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권력 수단이다.”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의 유명한 이 명제도 이런 점을 지적하는 통찰이다. 이게 지방선거에서 새정치연합이 기대 이하의 성적을 올린 이유다.
7·30 재보궐선거를 앞둔 지금 새정치연합이 이런 오류를 지금도 반복하고 있다. 총리 후보자를 비롯해 인사 문제 외에 새정치연합이 새롭게 제기하는 어젠다나 프레임이 없다. 특히 보통사람의 삶의 영역에서 제기되는 어젠다를 국가적 의제로 제기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프레임을 짜야 하는데 그런 노력조차 보이지 않는다. 새정치연합에서 나오는 말은 부정적 언사 일색이다. 긍정의 메시지가 보이지 않는다. 이래서는 인사 실패 때문에 대통령과 여당에 대한 지지율이 계속 떨어져도 실망한 유권자들을 결집·동원하는 데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다. 단언컨대 반대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
A가 싫어서가 아니라 B의 독자적인 매력이 있어야 그를 좋아하게 된다. 싫음에서 나오는 부정의 논리가 좋음이라는 긍정의 논리로 이어질 때 비로소 적극적 행동이 표출되는 법이다. A가 잘못하는 것만 끊임없이 반복해서 들추다 보면 결국 B도 외면당할 수 있다. 새정치연합의 집중 포인트는 ‘심판’보다 ‘대안’이다.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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