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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6.29 18:30 수정 : 2014.06.29 18:30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실장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제국의 위안부>를 이제야 읽어보았다. 여러 느낌이 들었지만, 가장 문제로 느껴진 것은 ‘운동’을 바라보는 그의 관점이었다. ‘일본의 지원운동’이 ‘정치화’되어 ‘제국 일본’만이 아니라 ‘현대 일본’까지 비판하게 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위안부 문제의 해결이 어려웠던 것은 바로 그런 식으로, 운동이 ‘현재’를 묻는 운동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벽에 부닥친 느낌이었다.

내가 1990년대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에 참여하게 된 이유가 바로 그것이 현재를 묻는 운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군 위안부’라는 존재 자체는 과거에 속하지만 문제로서의 ‘위안부 문제’는 현재의 문제다. 그리고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나도 이 문제를 알게 되었다. 즉, 나는 현재라는 시간을 매개로 위안부 문제를 만난 것이다. 저자가 과거와 현재를 분리하는 까닭은 제국 일본과 전후 일본의 단절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지만, 이 문제를 과거의 문제로만 다루게 될 때, 이 매개로서의 현재, 바꿔 말해 ‘우리’를 가능케 하는 현재는 사라진다. 남는 것은 전문가에 의해 진실이 규명되어야 할 과거의 ‘위안부’뿐이다.

이와 같은 과거와 현재의 분리를 뒷받침하는 논리가 ‘당사자’와 ‘지원자’라는 이분법이다. 저자는 “결국, 지원자들의 의도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위안부 문제 지원운동은 문제 해결 자체보다 ‘일본 사회의 개혁’이라는 좌파 이념을 중시한 셈이 되었다. 그곳에서도 ‘위안부’는 더이상 ‘당사자’일 수 없었다”는 식으로 당사자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 평가는 국민기금이 정답이었다는 전제 위에서 내려진 것이기 때문에 그 타당성에도 문제가 있지만, 더 큰 문제는 ‘위안부 문제’를 ‘위안부 당사자’만의 문제로 국한시키려는 그의 시선이다. “당시 지원자/단체가 천황제 폐지를 향한 ‘일본 사회 개혁’의 지향보다 위안부 문제 자체에만 집중했다면 위안부 문제의 해결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는 평가는 그런 시선을 잘 보여준다. 결국 순수한 지원운동이 아니었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이야기다. 이런 논법의 문제성은 지금 한국 사회의 맥락 속에 놓고 보면 더 분명해진다.

4·16(세월호 참사) 이후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대규모 집회를 비난할 때 흔히 사용되는 말은 ‘세월호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다. ‘박근혜 퇴진’을 내걸거나 청와대로 향하려고 하는 이들을 ‘순수한 추모가 아닌 다른 의도’를 가진 존재로 그려내 분리시키려는 시도는 언론을 통해 반복되고 있다. 그런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서는 이유는 그들이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1990년대부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전개된 운동의 당사자 역시 ‘위안부 할머니들’만은 아니다. 당사자와 지원자라는 이분법은 운동 속에서 형성되는 ‘우리’를 깨고 각자의 위치를 다시 고정시킨다. 그러면서 당사자는 운동의 성과를 판정하는 기준이 되며 지원자는 그 성과를 위해 봉사하는 존재가 된다. 여기서 새로운 사회는 생성되지 않는다.

<제국의 위안부>는 중요한 성찰을 담고 있기도 하다. 위안부 문제를 통해 기지촌을 사유하고 또 자본의 문제를 제기하는 관점은 중요하다. 그런데도 결론으로는 “위안부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하고 싶다면 기지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그것을 위해서도 일본과의 화해는 필요하다”는, 즉 미군기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과 화해하자는 엉뚱한 주장이 제시되는 이 괴리는 무엇일까. 그는 어떤 당사자인가?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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