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6.30 18:40
수정 : 2014.06.30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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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삼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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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11일 새벽, 밀양 송전탑 127번 움막 구덩이에서 나는 동래댁 할매와 윤반장 할아버지의 중간에 걸터앉아 몸에 쇠사슬을 둘렀다. 언제고 꼭 한번은 이런 날이 오리라 생각했다. 이길 수 있으리라는 기대보다는 어떻게 질 것인가를 생각해야 했던 지난 3년이었다. 나는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까. 움막 앞에서는 30여명의 연대자들이 스크럼을 짜고 있고, 움막 방 안에서는 쇠사슬을 두른 할머니들과 수녀님들이 있다. 사이렌 소리가 어지럽고 경찰의 군홧발 소리가 육박해오는데, 함께 쇠사슬을 묶은 내 옆 동래댁 할매는 눈을 감은 채 고요히 불경을 외고 있다.
경찰은 움막을 덮어놓은 부직포를 칼로 북북 찢는다. 컴컴하던 움막 안이 환해지고, 비명과 몸싸움, 지옥처럼 피어오르는 흙먼지 속에서 내가 있는 구덩이에도 경찰이 들이닥쳤다. 구덩이 위로 천장 삼아 쌓아둔 장작더미에 경찰들이 올라와 굴리기 시작하니, 구덩이로 흙이 쏟아져 내린다. 순간, 여기서 죽을 수도 있겠다는 공포가 밀려든다. 곁에 선 인권 활동가, 미디어 활동가들이 벼락같은 소리를 지른다. “여기 사람이 있어! 굴리지 마!”
내 옆 동래댁 할매에게 채증조와 몸싸움조, 절단기가 달라붙었다. 동래댁 할매는 쇠사슬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몸부림친다. 할매의 지난 4년여의 투쟁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병원으로 실려간 것만 몇번이던가. 봉천삼거리, 밀양댐 헬기장, 4공구 헬기장, 한전 밀양지사, 서울 본사, 풍찬노숙하던 기억들, 같이 투쟁하던 남편이 끝내 발병하여 수발하던 시간까지 지나왔다. 통곡인지 절규인지 알 수 없는 몸부림 끝에 할매는 마지막 쇠사슬까지 끊겼고, 끝내 들려나갔다. 할매는 혼절했다.
경찰은 아무렇지도 않게 칼로 움막을 찢었고, 쇠사슬을 두른 노인들의 목에 절단기를 들이댔다. 팔목이 꺾인 수녀님, 온몸이 멍투성이인 할머니, 그 하루에만 도합 19명이 병원으로 응급 이송되었다. 그들은 위험물질 제거를 명분 삼았으나, 움막 안에 위험물질은 아무것도 없었다. 움막 천장을 칼로 찢는 것을 올려다봐야 했던 할머니는 지금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300명이 넘는 목숨 단 하나를 살리지 못했던 4월16일 그 바다에서의 무능과 무책임은 20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한 줌 노인들을 수십분 만에 제압하는 신속 유능함에 정확하게 포개진다.
돈 때문인지는 다 알고 있다. 밀양 송전탑의 건설 여부에는 고리 지역 노후원전 연장 가동과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수출 드라이브, 신고리 5~6호기 증설에 이르기까지 수십조 단위의 천문학적인 돈이 걸려 있다. 세월호 이후에 어떤 일에서든 정권이 밀려서는 안 된다는 권력의 자기보호 본능이 또한 작용했을 것이다. 한 줌 노인들을 제압하기 위해 9개월 동안 연인원 38만명에 경찰 주둔 비용으로만 100억원을 들일 만한 분명한 이유가 그들에겐 있다.
마지막으로 들려나온 할매 한 분이 가쁜 호흡으로 개구락지처럼 떨고 있을 때, 구급차가 20분이 넘도록 오지 않아 내가 절규했다. ‘지금 할매 호흡이 가쁘다’고. 뒤에 늘어선 경찰 하나, 그 말을 받아 ‘나도 호흡이 가뻐~’ 빈정거렸다. 녀석의 빈정거림은 악마의 한 수 같은 것이었지만, 돌이켜보면 이것은 오늘날 자본과 권력이 다다른 윤리적 파탄의 정직한 실체였다.
세상에 넘쳐나는 이 많은 폭력은 왜 하나도 교정되지 않는 것일까? 저들은 왜 저렇게 마음대로 사람을 짓밟고 있는가? 우리들의 진실은, 정의는, ‘역사’라는 애매한 이름을 한, 먼 훗날의 심판에만 기대야 하는 것인가? 나는 아직도 그날의 기억 속에 머물러 있다. 그날을 생각하면 나는 아무 맥락도 없이, 지향 없는 눈물이 솟곤 한다.
이계삼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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