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7.08 18:22
수정 : 2014.07.08 18:22
|
김종엽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
장관 후보자들 대부분이 불법, 비리, 부패와 연루되어 있다고 보도되었다. 그래도 다들 자진사퇴 없이 꿋꿋이 인사청문회까지 왔다. 그럴 정도면 “뭔가 오해가 있다, 나는 잘못한 게 없다” 이런 항변이라도 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저 “잘못했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한다. 나이 오십줄의 인간들이 천명을 펼치는 것은 고사하고 친구의 연필 훔치다 걸려서 담임선생님 앞에 선 초등학생 시늉을 하는 걸 보는 것은 짜증나는 일이다. 더 나아가 담임 앞의 초등학생과 달리 잘못했다는 말이 믿기지도 않는다. 내 보기에 그들의 변명 가운데 진심을 담고 있는 말은 오직 “관행이었다”는 것뿐이다.
그런데 고약한 말이긴 하지만 말하는 이들부터 진심이어선지 이 “관행”이라는 말은 사람들 마음속에 파고드는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이 말로부터 사람들은 법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떠올리게 되며, 장관 후보자들과 별로 다를 것 없이 유리한 관행에 몸을 실었던 경험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어제 하루 내가 했던 일만 봐도 관행과 법 사이의 좁은 길을 지난 적이 많다. 운전을 하며 네다섯번 도로교통법을 위반했고, 불법 다운로드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하면서 내가 죄의식을 느꼈을까? 전혀 아니다. 집의 프린터에 종이가 떨어졌을 때 사무실에서 A4 용지 한 통을 집어온 적도 있는데, 그러면서 내가 한 일은 집에서도 학교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니 그래도 된다고 스스로에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며칠 전 후배와 저녁을 함께하고 밥값을 계산할 때 법인카드를 만지작거렸지만 끝내 쓰지 않았는데, 그때 나는 나 자신의 도덕성에 ‘감탄했다’. 이런 수준의 도덕성을 가진 내가 장관 후보자들을 비판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런 생각이야말로 관행의 바다에 자신을 맡기는 더 나쁜 태도다. 관행의 공범의식에 자신을 맡기지도 않으면서 동시에 관행과 무관한 고결한 기준을 들이대지도 않으려면 관행 자체 안에 선을 그어 넣어야 한다. 오스카 와일드가 그랬듯이 “도덕은 예술과 마찬가지로 어딘가에 어떤 선 하나를 긋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이 선을 어디쯤에 긋는가이다.
많은 이들이 언론보도를 보며 생각했을 것이다. “다운계약서, 그때는 많이들 그랬지. 하지만 땅투기하고 문제되니 냉큼 고추를 몇 그루 꽂아 놓는 건 너무한 거 아냐. 군복무 중에 대학원 다니는 것도 좀 그런데 유학까지 가는 건 너무한 거 아냐. 사외이사 좋지. 그래도 거수기 노릇에 수당을 수천만원씩 챙기는 건 너무한 거 아냐. 제자랑 공동저자면 됐지, 제1저자는 너무한 거 아냐. 그것도 10건 넘게.” 이런 “너무했다”는 판단은 장관 후보자들이 사람들 마음속 선을 넘었기 때문에 오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들이 대중의 마음속 선을 넘은 이유는 자신들의 마음속 선이 그것에서 한참 먼 데 그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간극을 우리 대통령은 신상털기식 인사청문회와 대중의 기준선 탓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맞는 방향은 엘리트들의 기준선을 대중 가까이 당겨오는 것이다. 그러니 청문회 무력화보다는 차라리 우리 사회 엘리트들에게 항상 자신들이 어떤 이상한 분의 수첩에 이름이 올라 인사청문회에 서게 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음을 상기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다.
방법은 다양한데, 우선 떠오르는 것은 한국연구재단에 연구실적을 입력할 때도 “당신도 인사청문회에 설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의 팝업창을 띄우는 것이다. 토지매매 계약서 서명란 옆에도 같은 문구를 써넣고, 병무청 입구엔 “당신 아버지도 인사청문회에 설 수 있습니다”라고 써놓는 것이 적당할 것 같다.
김종엽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