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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7.13 18:27 수정 : 2014.07.13 18:27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화해라는 말이 넘친다. 한-일 관계의 미래를 위해 역사 화해를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화해는 깡패들이 사람을 두들겨 패고 건네는 담배 한 개비 같은 것이 아니다. 아프냐 물으면서 건네는 ‘빨간약’ 같은 것이 아니란 말이다. 국내 정치에서도 마찬가지다. 야당 정치인들이 박정희 묘를 참배하거나 혹은 기념관을 짓자고 한다. 그들은 국민통합을 위한 역사 화해를 강조한다. 상처를 치유하지 않고, 망각으로 화해가 가능할까?

화해의 첫걸음은 진실이다. 진실이 없으면 화해도 없다. 누구를 혹은 무엇을 용서해야 하는지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일본 정부는 고노 담화를 수정하려 했다. 위안부 강제동원 사실을 부정해서 정부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이다. 가해자가 가해 사실 자체를 부정하면 화해는 어렵다. 우리는 일본 정부에 역사적 진실을 요구하고 있다. 진실의 중요성은 세월호 청문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무엇이 문제인지,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알아야 할 것 아닌가? 그래야 재발 방지 대책을 세울 수 있는데, 왜 진실을 두려워하는가? 진실을 부정하면 대책을 세울 수 없고, 그러면 비극은 반복된다. 진정으로 그것을 원하는가?

진실에서 화해까지는 여전히 멀다. 진실은 어쩌면 불편하다.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나을 때도 있다. 진실과 화해 사이가 복잡한 것은 개인 차원의 화해와 국가 차원의 화해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진실과화해위원회가 열렸을 때다. 위원회는 과거의 반인권 행위에 가담했던 경찰이나 보안군이 진실을 고백하면 사면해주었다. 국가통합을 위한 타협이었다. 그러나 피해자는 달랐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남편을 잃은 아내들이 “정의는 어디에 있나?”라고 울부짖었다. 미래를 위해 용서를 받아들인 사람들도 있지만, 가해자 처벌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정의와 화해의 균형은 전적으로 정치의 몫이다.

그리고 국가 차원의 화해를 앞세워 개인 차원의 화해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한·일 양국의 화해가 중요하다고 해서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이제 용서하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하물며 가해자의 역사적 성찰이 없는데 피해자에게 화해를 수용하라는 것은 폭력이나 다름없다. 세월호가 남긴 상처를 극복하자고 가족의 슬픔을 망각해서도 안 된다. 가족을 잃은 슬픔은 아주 오래간다. 공동체가 슬픔을 나누어야 한다. 그것이 국가의 존재 이유다.

화해는 얼마나 어려운가? 그래서 지속적인 실천이 필요하다. 남북관계도 마찬가지다. 남북관계에서 그동안 교류도 있었고 협력도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화해는 없었다. 우리는 전쟁을 치렀다. 원한의 사연들이 한반도 곳곳에 널려 있다. 시간이 흐른다고 해결될까? 그렇지 않다. 해원, 원한을 풀어야 한다. 남북관계에서도, 혹은 대북정책을 둘러싼 우리 내부에서도 진정 필요한 것은 화해다. 우리는 화해가 없는 교류와 협력이 얼마나 불안정한지를 지켜봤다. 우리 내부에서 언제든지 냉전의 광기가 부활하는 것도 진정한 화해의 과정이 생략되었기 때문이다.

화해는 관계의 조건이 아니다. 어쩌면 관계가 지향해야 할 목적 그 자체다. 화해가 이루어지면 평화는 지속가능하기 때문이다. 화해는 또한 과정이 아니다. 화해는 반복되는 순환일 뿐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도, 국가 사이의 관계도 부침이 있다. 상처가 있는 경우는 특히 그렇다. 상처는 잠복해 있다가, 관계가 일시적으로 후퇴할 때 재발한다. 그래서 화해의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화해가 없는 미래는 얼마나 불안한가?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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