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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8.03 18:24 수정 : 2014.08.03 18:24

김남국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가 겪게 되는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정치의 사법화’이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완성되어 갈수록 법의 지배라는 이름 아래 정치의 영역을 법이 대신하고, 정치과정을 사법과정이 대체하며, 정치가의 역할을 법률가가 대신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사전에 공공영역에서 토론을 통해 결정되어야 할 주요 사안들이 사후에 소송 절차를 밟아 결정되면서 시민의 역할은 줄어들고 왜소해진다. 이러한 현상을 우리는 정치의 사법화라고 부른다.

이와 같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정치의 우선성’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들은 애국과 헌신 등의 덕목을 갖춘 시민들이 정치공동체의 의사결정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공화주의 전통의 부활을 통해 정치의 우선성을 회복하자고 주장한다. 또한 합법성을 갖춘 법을 지키는 것이 민주주의의 전부가 아니라 그 법의 시대적 적실성을 시민들의 토론을 통해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민주주의 공고화 과정에서 이처럼 정치의 사법화와 정치의 우선성이 충돌하는 현상을 자주 목격한다.

민주화 이후의 정치에서 우리가 느끼는 답답함은 대체로 정치의 사법화 현상과 관련이 깊다. 한번 법치의 프레임에 빠져 이게 규정이고 저게 원칙이라고 따라가기 시작하면 도대체 뭘 개혁할 수 있는지 헤어나기 힘들다. 이 상황에서 여전히 기존의 힘 관계와 틀 자체를 바꾸는 사회운동이 중요하고, 특히 기존의 법치 프레임을 뛰어넘는 창조적인 사회운동 방식이 필요하지만 민주주의 시대에는 정치의 우선성의 회복도 법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는 딜레마가 있다.

정치와 법의 관계는 경제와 화폐의 관계로 비유할 수 있다. 경제가 원활하게 굴러가는 수단으로서 화폐가 필요하듯이 정치가 안정적으로 운영되기 위한 도구로서 법이 필요하다. 정치가 분명 법을 만들어내지만 법치가 정치의 전부인 것처럼 그 관계는 자주 역전된다. 사람들에게 법은 낯설고 선험적으로 주어진 비밀스런 코드로서 오직 법률적 소양을 갖춘 사람만이 해독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법은 사람들의 이해를 권위 있게 조정하려는 타협과 양보로 이루어진 정치 과정의 산물이다. 다시 말해, 법은 시민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약속의 결과로서 성립되며 시민들은 이 계약의 당사자로서 언제든지 이 문서를 열람하고 이의를 제기할 권한을 갖는 것이다.

동시에 약속으로서 한번 성립된 법은 다음 단계의 이해와 타협에 기초를 제공한다. 따라서 시민들 사이의 약속에 불변의 원칙이 존재하리라고 믿는 것도 한계가 있지만, 법조문의 엄격한 적용을 법의 존재 이유로 삼는 것도 불완전하다. 아마 정치와 법의 구성적인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흐름은 보통법의 전통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시대의 불편함을 공유한 사람들의 요구에 의해 법은 자라나고 이 과정에서 시민적 주체가 형성된다. 그러나 이렇게 성립된 법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적실성을 잃고 화석화된 개념이 되기 쉽기 때문에 시민들의 토론에 의해 그 개념의 적실성을 복원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세월호 특별법을 둘러싼 갈등은 기존 법의 미비함에 불편함을 느끼는 계약의 주체로서 시민들의 요구와, 법은 선험적으로 주어진 배타적 권위라고 믿는 사람들 사이의 긴장을 보여주고 있다. 만약 법을 지키는 것이 정치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법은 논리가 아니라 경험이고 시민 생활 속에서 변화하고 자라나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시민들의 다양한 요구를 수렴하는 공론장이 없는 법치는 법을 위한 법치에 그칠 수밖에 없어 맹목적이고 위험한 것이다.

김남국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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