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8.18 18:32
수정 : 2014.08.18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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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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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단식농성장에서 아들의 손을 잡고 유민 아빠 김영오씨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의 몸은 바싹 말라 있어, 입고 있는 셔츠가 바람에 나풀거렸다. 얼굴은 검게 그을려 있었는데, 그게 따가운 여름의 태양빛 때문인지 단식으로 인한 이상 때문인지는 알기 어려웠다.
8월15일의 서울시청 광장에서 그의 육성을 처음 들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를 잘 아는 것처럼 느껴졌다. 예은 아빠 유경근씨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에스엔에스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래서 불면의 새벽에 탄식처럼 올라오는 글들을 보며 그가 괴로워하고 있구나 하며 나도 괴로워했다.
이 괴로움의 감정은 인간적인 것이다. 나는 그를 만나본 적도 없고, 이야기를 나눠본 적도 없으며, 그간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아마 40대의 역사와 일상이 만들어낸 비슷한 삶의 주름을 만들어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나의 삶의 주름은 4·16을 기점으로 크게 갈라졌다.
생명의 상실은 회복될 수 없다. 회복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청년기에는 죽은 이를 살려내라는 요구로 시대에 맞섰던 기억이 많다. 그런데 김영오씨와 세월호의 희생자 가족들은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있다. 유가족들에게 이는 죽은 이를 살려내라는 통절한 절규를 극도로 승화시키고 인내한 이성적 요구이다. 또 이 요구는 민주사회가 아니더라도 인간공동체가 유지되는 한 지켜져야 할 인륜성의 마지막 가치를 환기한다.
여기 304명의 고유한 죽음이 있다. 이 죽음의 원인이 지진이나 쓰나미, 유성의 지구 충돌과 같은 천재지변이 아닌 인재인 한, 거기에는 원인이 있고, 그것을 초래한 사람과 시스템이 있으며, 당연히 책임 당사자들이 있다. 이 단순하고 투명하고 상식적인 ‘사실’을 밝히라는 것은 유족의 권리일 뿐 아니라 인간의 권리다.
이 인간의 권리를 보장하라고 정부와 의회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부와 의회가 이러한 인간의 권리를 부정하거나 회피한다면. 유족을 모욕하는 데 앞장서거나 그 사태를 방관하고 있다면. 스스로 세월호 대참사의 최종책임자라며 눈물 흘렸던 대통령은 두 번의 선거가 끝나자 아예 이 대참사에 대한 언급 자체를 봉쇄했다.
그러는 사이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했고, 여러 차례에 걸쳐 세월호 가족들에 대한 깊은 위로와 행동과 발언을 보여주었다. 가족들은 교황 앞에서 눈물을 흘렸고 고통의 상징인 편지와 십자가를 드렸고, 교황은 그 엄숙한 상징의 의미를 십분 이해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행동할 것으로 예상되는 행동을 한 것이다. ‘공감능력’은 인간성과 인륜성의 가장 근본적인 토대이기에, 교황이 아니더라도 유족 앞에서 우리는 당연히 모든 사람이 그렇게 행동할 것을 기대한다.
그런데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적지 않다는 점은 충격적이다. 더구나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권력을 좌우하고 있는 집단 내부에서 터져나오는 유족들에 대한 매도와 조롱은 이것이 인간인가 하는 심각한 충격을 우리에게 던진다. 그런 당신들은 누구인가? 당신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렇다면 남는 문제는 이런 것이다. 진상규명 요구를 봉쇄하는 힘이 조직적이고 완강하다면, 또 인간적 덕성의 토대를 구조적으로 파괴하는 힘이 ‘진상규명’에 필사적으로 저항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더 압도적이고 완강한 정의와 연대의 힘으로 그것을 교정하거나 극복할 수밖에 없다. 세월호 대참사의 진상규명은 포기할 수 없는 인간적 외침이다. 만일 이 외침이 소음 속에 묻혀버린다면 우리의 인간됨은 먼지처럼 희미해져 갈 것이다. 인간의 권리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사수해야 한다.
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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