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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9.10 18:37 수정 : 2014.09.10 18:37

김현정 <의사는 수술받지 않는다> 저자

“응급환자가 발생했으니 탑승객 중에 의사나 의료진이 있으면 승무원에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서울로 들어오는 비행기 안, 기내방송이 흘러나왔다. ‘누군가 있겠지…’ 눈을 계속 감고서 담요를 더 끌어올렸다. 언젠가 한번은 방송을 듣고 튀어나가 보니 네댓명의 의사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와 북적이던 민망한 상황도 있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환자가 발생했습니다. 의사를 찾습니다. 어서 도와주세요.” 방송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나는 일어섰다.

환자는 꼬리 쪽 바닥에 눕혀져 있었다. 인도 여인이다. 자리에 앉아 있던 중 갑자기 의식을 잃고 옆자리로 쓰러졌다고 한다. 먼저 숨을 쉬는지 확인한다. 숨은 쉰다. 얼굴이 파리하다. 손목을 잡으니 맥박이 희미하게 뛰고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 순간 의사의 머리가 긴박하게 돌아간다. 트렌델렌버그 포지션!(머리를 낮추고 다리를 높이는 자세) 당장 환자 머리에 받쳐진 베개를 빼고 모포를 닥치는 대로 가져오라고 해서 다리를 높였다. 혈압이 서서히 올라간다. 잠시 후 얼굴에 핏기가 돌아오며 정신을 차렸다. 탑승 후 빈속에 감기약을 먹었다고 한다. 아마도 항히스타민제가 말초혈관을 확장시켜 급작스럽게 혈압을 떨어뜨렸던 것이리라. 여인이 차가운 손으로 내 손을 꼭 쥐고 놓질 않는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입술을 달그닥거린다. 귀를 가까이 대니 조그맣게 속삭인다. “나마스테.”

의과대학에서 떠돌던 유머 중에 ‘환자수 총량 보존의 법칙’이라고 있다. 수련의 시절 당직 때마다 유독 환자를 타는 의사에겐 나중에 환자가 별로 없고, 반대로 널널하던 의사에겐 오히려 환자가 몰린다는 짓궂은 농담이다. 고로 의사 한사람이 평생에 보는 환자의 총량은 같다, 이런 뜻이다. 기업에서 일하던 시기, 해외출장이 잦아서 한 달에 보름은 여기저기 나가 있었다. 탑승만 하면 환자가 유난히 자주 발생했다. 얄궂게도 그때마다 그 흔한 의사가 나밖에 없다. ‘환자를 안 보니까 비행기 탈 때마다 환자가 발생하는군.’ 한번은 숨을 통 안 쉬는 위태로운 환자를 만났다. 기도를 확보하느라 진땀을 뺐다. 타이베이에서 들어오는 중이었는데 사무장이 묻는다. “제주도에 비상착륙할까요?” 내 참, 나더러 그런 결정을 하라니…. “조금만 더 가면 서울이니 그냥 가 봅시다.” 환자를 붙잡은 채로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착륙했다. 들것에 옮기고 대기하던 의료진에게 인계하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친분 있는 ㅅ대 외과 주임교수도 이 비슷한 경우를 만나서 환자가 안정을 되찾기까지 몹시 애먹었던 적이 있다고 한다. 프랑스 비행기였는데 내리면서 감사의 뜻으로 포도주 한 병을 선물로 받았다. 한데 문제는 바로 이어서 다른 비행기로 갈아타야 하는 상황이라서(기내 액체류 반입이 안 된다) 십분 안에 그 포도주 한 병을 다 마셔 비우든지 버리든지 해야 했다고.

비행기란 특수한 상황이다. 날고 있는 중에 발생한 의료상황에선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약품과 기구는 미미하고(응급박스 가져와 펼치는데 쓸만한 것은 거의 없다), 구미에 맞는 전문의를 선택할 수도 없다. 진료비도 건강보험도 청구되지 않는다. 비급여 항목도 포괄수가제도 원격진료도 작동하지 않는다. 진단과 처치는 전적으로 우연히 만난 어느 의사 개인에게 달렸다. 아이러니하게도, 날고 있는 비행기야말로 환자와 의사가 “의료” 본연의 이유만으로 만나는, 의사가 가장 의사다울 수 있는 특이한 공간이 된다. 장비도 없고 약도 없고 관리인력도 없고 병원이라는 플랫폼도 없는 상황에서 의사는 그저 지식과 기술과 경험을 총동원하여 최선을 다할 뿐이다.

김현정 <의사는 수술받지 않는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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