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4.10.15 18:36 수정 : 2014.10.15 18:36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아무리 좋게 봐도 우리 정치를 좋아하거나 신뢰하긴 어렵다. 누군가 긍정의 힘을 충고하지만 실제로 한국 정치를 보고서도 과연 그런 소리를 할까 싶다. 정치가 보여주는 지질한 행태나 잡아먹을 듯 하는 언사가 눈에 쉽게 띄는 미운 짓이지만, 국민이 정치를 불신하는 본질은 다른 데에 있다. 무능이다. 우리 정치를 규정하는 한 단어를 꼽으라면 무능이 가장 적합해 보인다.

사실 어느 나라나 정치는 불신의 대상이고, 어쩌면 그게 정치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영국의 제리 스토커 교수는 다양한 의견과 이해를 조정해야 하기 때문에 정치는 불가피하게 실망을 안겨줄 수밖에 없다고 했다. 모두를 만족시킬 해법이 어디 있으랴. 그렇다면 마키아벨리의 통찰대로 득을 보는 사람은 그걸 당연하다고 생각해 말이 없는 반면 손해 본 사람은 억울해하면서 이런저런 불평을 늘어놓기 마련이다. 불만의 목소리가 바로 정치를 믿지 않는 정치불신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정치가 욕을 먹는 것 자체를 피할 수는 없다. 문제는 욕을 먹는 이유다.

우리 정치가 불신을 사는 이유는 간단하다. 엉뚱한 것을 두고 다투느라 정작 보통사람의 삶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무능 때문이다. 먹고사는 문제, 즉 사회경제적 어젠다를 두고 각자의 해법이 더 낫다며 경쟁하지 않고 정치·도덕적 의제를 놓고 선악의 대결을 펼치고 있다. 무능 중에 이처럼 할 일 안 하는 무능이 최악이다. 선과 악, 옳고 그름의 차원으로 다투면 타협이 어렵다. 예컨대 선거부정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는 걸로 대립하면 타협이 불가능하다. 반면, 기초연금 지급 대상과 금액에 대해서는 이견이 조정될 수 있다. 담뱃값 인상 여부를 놓고 다투면 타협이 쉽지 않다. 그러나 얼마 올릴 것인지를 갖고 따지면 얼마든지 절충이 가능하다. 정치가 어차피 먹을 욕 그나마 ‘제대로’ 먹으려면 어젠다 세팅(의제 설정)을 바꿔야 한다.

그런데 정치불신론에는 함정이 숨어 있다. 정치가 워낙 욕먹을 짓을 하긴 해도 실상보다 과도하게, 끊임없이, 그리고 의도적으로 매도된다는 사실이다. 일종의 ‘정치 때리기’(politics baiting)다. 정치, 즉 의회와 정당에는 경쟁자들이 있다. 행정부, 언론, 기업 등이다. 이들은 정치가 영역을 확장하는 게 싫다. 정치가 국민을 대변·대표하는 역할을 제대로 하면 할수록 경쟁자들의 그것과 입지는 줄어든다. 입법부와 행정부(대통령)는 둘 다 선출된 권력이기 때문에 경쟁관계다. 의회가 제대로 작동하면 행정부의 영역은 줄어든다. 흔히 시장은 1원1표, 정치는 1인1표의 시스템으로 움직인다고 표현한다. 1원1표에 비해 1인1표는 부자에게 불리하고 서민에게 유리하다. 부자는 소수고 서민은 다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를 통해 서민의 이해가 많이 반영될수록 시장의 강자인 기업과 부자들로선 손해를 보기 쉽다. 사회적 공기 또는 국민의 대변자 역할에서도 정치는 언론과 경쟁한다.

정치의 한심한 모습, 무능 때문에 유권자가 의당 갖게 되는 불신과 담론으로서의 정치불신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사상적 담론으로서의 정치불신은 정치를 혁신하게끔 추동하기보다는 위축시키고, 정치인들이 기득권에 안주하도록 만든다. 정치불신 담론으로 인해 유권자가 정치에 대한 관심을 거두게 되고, 그럼으로써 정치인들은 계속 무능해진다. 결국 정치불신의 수혜자는 현실 정치인과 그 경쟁자들이고, 피해자는 유권자다. 정치혁신은 정치불신론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치관심론, 즉 유권자들이 그야말로 ‘권력을 가진 주인’으로서 잘 지켜보고, 평가하고, 상벌로 심판할 때 이뤄진다.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세상읽기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