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10.20 18:42
수정 : 2014.10.20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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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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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존재로서의 삶’을 살고 싶다 생각했다. 소유한 것도 없었지만, ‘존재’에 대해 아는 것은 전혀 없었다. 나는 존재라는 말을 스스로를 긍정하는 것으로 의식했을 뿐이다. ‘가짜 삶’이 아닌 ‘참된 나’를 찾는 것이야말로 ‘존재하는 삶’이 아닌가 하는, 문학도 특유의 낭만주의였을 것이다.
반면, ‘소유하는 삶’에의 강박은 갈수록 명백해졌다. 이것은 사회로부터 강요되는 거대한 압력이었다. 사정이 좋을 때, 동기들은 큰 직장에 취업했고 얼마간의 돈을 만지기도 했다. 직급이나 직위는 높아졌고, 학창시절에 비하자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져 차의 배기량도 높아졌고 멋진 상표의 옷도 입고 다니게 되었다. 대출받아 집도 샀다.
물론 위기도 겪었다. 항시적인 구조조정과 감봉 위협에 시달렸고, 퇴사 후 자영업자도 되었다. 미래에 대비한답시고 여러 형태의 자격증도 보험 삼아 따기도 했다. 40대가 되자 은퇴 준비를 한답시고 얼마 안 되는 돈으로 경매 사이트를 드나들고, 드물게 목 좋은 땅을 구입하기도 했고, 자산 증식을 위해 지방의 아파트를 사기도 했는데, 이제는 애물단지로 전락해 ‘하우스푸어’라는 말을 떠올리는 이들도 없지 않다. 생활인의 균형감각은 정치라는 거, 결국 ‘정치계급’의 밥그릇 싸움 아닌가, 냉소하는 술안주도 마련해 놓기도 했다.
하나 공통적인 것은 그들이 ‘이 땅’에 진절머리를 낸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미스터리라며 종종 입에 올렸던 일찍 이민 간 친구를 부러워하는가 하면, 난데없이 주말에 사회인 야구를 하고 있다며 야구장갑과 방망이와 단복을 입고 경기장으로 나가기도 하고 있다. 때아닌 ‘춤바람’도 나서 요가(이것도 춤인가?)에서 탱고로 나아가더니, 요즘엔 신부님과 스님들의 말씀도 열심히 듣고 영적인 생활에 심취한 친구도 있다. 자식 걱정으로 날밤을 새우면서도 이건 아닌데 하는 인생에 대한 회의가 깊어지는 가을이다.
소유하는 삶에 대한 집착은 여전히 강렬하지만, 존재하는 삶에 대한 고뇌도 어쩔 수 없이 깊어지는 것은 우리들의 부모들이 하나둘 영원한 세계로 이별여행을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세월 탓인가, 친구들 역시 ‘소유하는 삶’의 가중치 대신 ‘존재하는 삶’으로의 전환을 준비하고 있다.
‘존재하는 삶’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면 ‘연합하는 삶’에 대한 모색으로 이어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진보주의자들은 ‘깨시민’으로 냉소하고 보수주의자는 ‘빨갱이’라 증오하기도 하지만, 주말이면 이웃들과 만나 텃밭농사 후에 막걸리도 마시고,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헛스윙도 하고, 서울을 떠나리라 호언장담도 하며, 광화문에서 노란 풍선을 흔들면서 “대통령이 책임져라” 구호를 따라 부르는 친구들은 평범한 생활인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중앙권력의 집권세력만 보면 무능하고 절망적이다. 하지만 생활인의 범속한 만남과 우정의 끈끈함과 결속력을 생각해 보면, ‘희망의 원리’는 우리 등잔 밑에 있다.
‘소유하는 삶’의 엄포에 생활인들은 현재까지 지나치게 위축되어 왔다. 반면 ‘존재하는 삶’의 거룩함은 아름답지만 알쏭달쏭하다. 그러나 이웃들과 만나고 뭔가를 모색해 보는 ‘연합하는 삶’의 일상이 저변에서 깊어지고 활발해지고 있는 것은 미래에 대해 희망을 가져도 좋을 명백한 징후다.
‘막걸리 반공법’에 대한 대항은 ‘막걸리 구비문학’이라는 생활인의 풍자로 나타났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장구한 혁명은 이들에 의해 발효되었다.
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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