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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1.03 18:38 수정 : 2014.11.03 18:38

김계수 농부·<순천광장신문> 발행인


봄은 밑에서 위로 올라가고 가을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다. 땅의 고도에 따라서도 그렇고 위도에 따라서도 그렇다. 봄철에는 화사한 진달래와 산벚꽃이 산자락 끝에서 시작하여 정상을 향해 봄을 밀어올리고, 남녘에서 중부 이북으로 번져간다. 그러나 올봄에는 세월호 침몰과 더불어 자연도 혼란스러웠던지 태곳적부터 이어온 리듬을 잃어버리고 봄꽃들이 전국에서 동시에 개화했다. 그 당연한 결과로 매실 같은 봄 과일들 또한 전국에서 동시에 수확되어 시장에 한꺼번에 쏟아지면서 가격이 폭락하는 사태를 겪어야 했다.

가을의 전령사인 단풍은 봄꽃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10월 말에 산봉우리에서 시작된 단풍은 11월로 접어든 지금 앞산 중턱까지 내려와 앉아 있다. 이맘때가 되면 산골의 맑은 개울물은 더욱 맑아진다. 비가 많지 않아 탁한 지표수가 개울로 흘러들지 않은 탓일 게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개울물은 알 듯 모를 듯 한 연녹색을 띠고 있다. 봄에 마른 가지에 돋아나는 새 이파리들의 빛깔을 떠올리게 한다. 산골의 개울물이 가장 아름다운 때다. 가을에 물빛이 이렇게 변하는 것은 나무들이 겨울 추위를 견디기 위해 몸에 지니고 있는 수분을 뿌리를 통해 내보내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내 멋대로 짐작한다.

단풍과 낙엽은 감나무나 단풍나무, 참나무처럼 겨울을 완전히 헐벗은 채로 지내는 것들만의 일은 아니다. 소나무 같은 상록수들도 가을이면 밑가지를 중심으로 일부 잎에 노란 단풍이 들고 이를 떨어뜨려 생육이 침체되는 겨울을 준비한다. 어릴 적 아궁이에 불을 지펴 요리와 난방을 하던 시절에 땅에 떨어진 소나무 잎을 긁어모은 땔감은 불기운도 좋고 모디게 타들어가기 때문에 여러 가지 부엌일을 동시에 해야 하는 여인들에게는 아주 고맙고 귀한 연료였다. 겨울을 앞둔 나무들은 이렇게 제 몸 안의 물기를 비우고 잎을 버림으로써 생육을 포기하는 대신 제 속살을 단단하게 다질 것이다. 나무의 나이테에서 진한 색조를 띤 좁고 단단한 테가 그것이다.

24절기 중에서 입추와 처서를 지나 찬바람이 일기 시작하면 작물뿐 아니라 잡초들도 열매를 맺기 위해 바쁘다. 봄부터 한여름까지 왕성하게 자라던 잎과 줄기는 진한 녹색에서 조금씩 옅어지면서 누런색으로, 끝내는 갈색으로 변해간다. 손으로 만져보면 한여름의 부드러움을 잃어 점점 빳빳하고 거칠어진다. 열매를 만들고 살찌우는 일에 힘을 쏟는 것이다. 이때부터 농부는 비로소 잡초에 대해 여유를 갖게 되지만, 이들이 씨를 맺어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맘때 논밭의 잡초들은 땅에 납작 붙은 채로 끝에 실한 열매들을 달고 있다.

우리 집에서 키우는 닭들 또한 태양이 하지의 정점을 지나 낮아지기 시작하면 벌써 겨울을 대비하기 시작한다. 녀석들은 추위를 견디기 위해 부드러운 새 깃털도 준비해야 하고, 몸 안에 기름기도 채워야 하기 때문에 먹이를 봄철보다 더 먹어야 한다. 이것을 소홀히 하면 늦가을부터 봄이 올 때까지 알을 낳지 않을 수도 있다. 풀섶을 느릿느릿 기어다니는 사마귀는 알을 얼마나 많이 낳으려는지 마치 범선의 돛이 바람을 안은 모양으로 배가 팽팽하게 불러 있다.

가을에는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자연이 준 나름의 섭리에 따라 이처럼 춥고 어려운 시간을 견디기 위해, 다음 세대를 위해 온 힘을 기울인다. 가을은 몸을 키우고 번성하기보다는 비우고 버림으로써 내부를 살피고 단단히 하는 계절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오직 인간만이 이 섭리를 벗어나 계속 채우고 불리고, 놓지 않으려 한다. 단단하게 여물어가기보다는 노회해질 뿐이다.

김계수 농부·<순천광장신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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