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11.05 18:28
수정 : 2014.11.05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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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정 <의사는 수술받지 않는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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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와 비둘기가 있다. 매는 주장을 관철하려고 무력을 불사하며 죽기 살기로 피를 볼 때까지 싸운다. 비둘기는 상대와 타협하고 일을 온건하게 처리하며 피 흘리는 싸움은 되도록 피해간다. 실제 새들의 습성과는 거리가 있다지만 관습상 우리는 사람들의 성향을 놓고 이에 빗대어 ‘매파’와 ‘비둘기파’라고 부른다. 하지만 인간의 실제는 이보다 훨씬 복잡하다. 평소 매처럼 굴다가도 실제 공격을 받으면 즉시 도망가는 ‘허풍형’도 있고, 비둘기를 만나면 비둘기가 되고 매를 만나면 매로 돌변하는 하이브리드 ‘조건형’도 있다.
한편, 성성옹 허균 선생은 일찍이 백성을 셋으로 분류하였다. 이래도 저래도 묵묵히 부림을 받으며 항상 있는 ‘항민’, 언제나 한탄하고 원망하는 ‘원민’, 고슴도치처럼 웅크리고서 천지 사이를 흘겨보며 호시탐탐 때를 노리는 ‘호민’이다. 굳이 대입해 보자면, 항민은 비둘기요, 원민도 비둘기요(일부 매도 있을 것이다), 호민은 조건형일 것이다.
이번 국감에선 ‘관피아’(관료+마피아) 관련 스무 가지가 넘는 새로운 ‘피아’가 대거 쏟아져 나왔다. 익히 알려진 해피아(해양수산부), 원피아(원전), 교피아(교육부)를 비롯해서 오다피아(공적개발원조·ODA), 방피아(방위사업), 전피아(전력), 세피아(세무), 통피아(통신) 등등 별별 피아가 난무했다. 어찌 응답하는 관료들뿐인가? 다그치는 대다수 국회의원들조차 둘째가라면 서러울 ‘피아 중 피아’ 아닌가? 피아들끼리의 생쇼, 그들만의 리그, 당신들의 천국 아닌가?
새삼스럽지도 않거니와, 연고주의는 이제 피아주의라는 진화된 형태로 강화되었다. 혈연도 지연도 학연도, 파벌과 이념도 ‘실질적 이권’ 앞에선 별 힘을 못 쓴다. 이권을 공유하는 같은 직군 사람들이 끼리끼리 헤쳐모여 어깨동무하고 철옹성을 쌓았다. 이들에게 공정성이나 사명감을 기대하는 것은 철 지난 낭만처럼 되어버렸다. 피아가 단순한 이익집단과 다른 점은 우리 사회가 이들에게 무소불위 공권력이나 법적으로 보장된 불가침 면허 자격을 부여해놨다는 점이다.
공적 신뢰가 무너져 내린다. 사람들이 사법부 재판 결과를 곧이곧대로 믿질 않는다. 의사들 처방을 의심스러워한다. 단통법은 누구를 위한 법인가 쓴웃음을 짓는다. 연이어 드러나는 무리한 정책 강행은 대개 무능이 아니라 범죄인데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오히려 전관예우, 재취업, 황금퇴직금과 마르지 않을 연금을 보장받는다. 회수하기 어렵다는 해외투자금 액수는 입이 떡 벌어진다. 결국 또 국민의 피땀을 쥐어짤 것이다.
프랑스 어느 방송에선 시민을 대상으로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지배층인지 중산층인지 서민층인지 알아보는 19항목의 설문지를 소개한 적이 있다. 재미난 질문들이 보였다. “증조부의 이름을 알고 있는가?” “가문의 성을 딴 길이 있는가?” 이쯤 되면 을지문덕 장군이나 퇴계 이황 선생의 직계자손은 되어야 상류층 자격이 될 것 같다. 우리나라라면 어떨까? “그대는 소속된 피아가 있는가?” “부모나 조부모가 소속된 피아의 이름을 알고 있는가?” 이런 설문이 날아갈 것 같다. 우리나라 교육열이 이렇게 뜨거운 것도 자녀를 어떻게라도 미래의 피아로 만들어보려는 부모들의 한 맺힌 발버둥 아닐까?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이라고 했다. 어쩌다 ‘비단 같고 꽃 같은’ 우리나라가 ‘아’도 아닌 ‘비아’도 아닌 ‘피아’들의 나라가 되었을꼬? 비둘기들이 손 놓고 넋 놓고 이리저리 휘둘리며 ‘호갱님’ 되어준 덕분이다. 그러나 비둘기 우습게 보지 마라. 비둘기 속에 잠자코 있던 호민들이 언제 돌변하여 들고일어날지 모르니까. 천하에 두려워할 것은 백성뿐이니까.
김현정 <의사는 수술받지 않는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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