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11.30 18:49
수정 : 2014.11.30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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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국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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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선거제도는 두 가지 상반된 원칙을 동시에 충족시켜야 한다. 하나는 공정한 대표(fair representation)이고 다른 하나는 통치가능성(governability)이다. 물론 가장 공정한 대표는 시민 모두가 자기 자신을 스스로 대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는 효율적인 통치가능성에 문제가 생긴다.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충분한 토론과 심의를 통해 적절한 의사결정을 해 갈 수 있을지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반면 대표의 숫자를 줄이면 통치가능성의 지표는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공정한 대표의 문제가 생겨난다. 따라서 세계의 선거제도는 이 두 가지 원칙에 대한 고민을 반영하고 각국의 독특한 조건들을 고려하여 고유한 대표의 체계를 만들어낸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근대의 선거제도는 등장 초기에 통치가능성에 초점을 맞췄다면 최근에는 공정한 대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여 왔고, 단순다수 소선거구제가 통치가능성에 더 중점을 둔다면 비례대표제는 공정한 대표에 더 초점을 맞춘 제도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정치적 대표의 숫자로 보면 시민 16만여명당 1인의 대표를 선출하여 4만여명당 1인을 선출하는 영국, 7만여명당 1인의 프랑스, 11만여명당 1인의 독일보다 대표의 비율은 낮은 편이다. 이 통계를 근거로 의원 수를 늘리자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정치적 대표는 단순히 시민 몇 명당 대표의 숫자로 일괄 비교할 수 없고 지역적 대표성이나 성별, 직업별, 연령별 대표성 여부 등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예컨대 영국은 정치적 대표의 비율이 높지만 비례대표가 없는 단순다수 소선거구제를 채택하여 정당별 지지율과 실제 의석 점유율 사이의 차이가 크다. 이에 대해 영국은 자신들은 의도적으로 ‘일할 수 있는 다수’(working majority)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독일의 경우 정치적 대표의 비율은 영국보다 낮지만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통해 정당의 지지율과 의석 점유율을 일치시킴으로써 공정한 대표의 원칙에 더 충실하다.
우리나라 선거구제 개편 논의에서 비례대표 확대 여부가 관심을 모으는 것은 궁극적으로 공정한 대표의 원칙과 관련이 있다. 시민 1인당 정치적 대표의 등가성을 확보하고 동시에 다양한 집단의 대표성을 높이는 것이 다수결과 소수의 권리 보호라는 민주주의의 두 축을 구현하는 데 중요한 전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향의 개편 가능성에 대해 많은 시민들이 비관적이다. 양대 정당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방해하는 개편에 동의할 리 없다는 생각에서다.
정치학자 립셋과 로칸이 말한 이른바 동결 가설(freezing thesis)에 따르면 근대의 중심과 주변, 노동과 자본 등의 균열 구조를 반영하여 형성된 과거의 정당들은 지속적으로 대안 정당의 등장을 제한하고 유권자 선호 자체에도 제약을 가한다. 최근의 젊은 세대 입장에서 보자면 유권자 선호 이전에 먼저 형성된 정당 구조가 자신들의 선호를 반영하지 못하거나 결과적으로 왜곡하고 있는 현실은 분통이 터질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대의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이유는 단지 인구가 많고 땅이 넓어서 물리적으로 시민 각자의 직접 대표가 불가능해서만은 아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단순한 선거구민의 대리인이 아닌 독립적이고 탁월한 대표의 가능성과 그들이 행하는 공공선을 향한 심의 가능성을 믿기 때문이다. 즉 현재의 선거제도 개편 논의는 단순한 선거구 재획정 문제가 아니라 공정한 대표의 확대와 동결된 정당 구조의 개혁, 그리고 의원 개개인의 대표와 심의 능력 제고를 통해 정치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과제가 중첩되어 있다.
김남국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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