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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1.25 18:45 수정 : 2015.01.25 18:45

서구의 근대는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이 이성과 과학을 바탕으로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계몽의 기획과 함께 시작됐다. 이 기획을 이룩할 정치공동체인 근대국민국가는 프랑스혁명을 통해 최초로 탄생했고 공화국을 지탱하는 핵심에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구분한 다음 종교를 사적인 영역에 유폐시킨 세속주의가 자리잡고 있었다. 따라서 중세의 유혈 종교갈등을 세속주의 원칙으로 해결했다고 믿는 프랑스 공화주의자들에게 공적 영역에서 벌어지는 무슬림의 인정 투쟁은 중세의 전철을 다시 밟으려는 어리석은 시도로 보일 것이다. 당연히 이들에게 원시적 부족주의와 종교적 신념이 싸우는 암흑의 정글로 떨어지지 않을 방법은 공화주의 원칙의 굳건한 고수일 수밖에 없다.

군주를 제거하고 종교를 사적 영역에 유폐시키면서 시작된 프랑스 공화주의 전통에서 보면 모든 세속적 권위와 근엄한 종교 권력에 풍자와 조롱을 퍼붓는 샤를리 에브도는 가장 프랑스적인 잡지다. 샤를리 사건에서 우리가 이의 없이 합의하는 관점은 테러에 대한 비판일 것이다. 신념의 차이를 이유로 폭력을 동원해 상대를 멸절하는 것이 반문명적이라는 점에 사람들은 동의하고 테러집단을 비난한다.

그러나 테러가 아닌 표현의 자유를 중심으로 이 사건을 보면 타 종교에 대한 존중을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과 제한 없는 비판을 옹호하는 이른바 표현의 자유 근본주의자가 나뉜다. 사실 존중과 비판의 양립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예컨대 홀로코스트 희생자에 대한 비난처럼 자신이 선택할 수 없었던 사건의 피해자를 조롱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를 벗어난 혐오 발언에 해당하고 이것은 우리가 속한 문화 전통이나 종교적 신념 체계를 비판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무제한의 비판과 풍자가 갖는 미덕은 상대에 대한 단순한 모욕이 아니라 기성 권위와 획일화된 시선의 해체를 통해 우리가 익숙해 있던 신념의 체계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데 있다.

만약 샤를리 테러를 문화 사이의 갈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프랑스 공화주의는 공동체의 의사결정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시민의 덕목을 강조한다. 또한 개인과 국가를 매개하는 중간집단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개인적인 정체성을 사적 영역에 남겨두고 추상적인 시민으로 공화국 앞에 나올 것을 요구한다. 이와 같은 입장은 우리도 동등한 인간이기 때문에 보편적 인권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사회적 소수의 한 가지 이해를 잘 반영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다르기 때문에 차이에 대한 사회적 인정을 필요로 한다는 또 다른 측면의 요구에는 취약하다. 무엇보다 프랑스의 상징인 관용은 공화주의 원칙을 공유하지 않는 사회적 소수에 대해 적용되지 않으며 이런 이유로 공화주의는 세속근본주의 이름 아래 다양한 신념을 가진 개인을 파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비난받기도 한다.

사회적 소외와 종교적 신념이 잘못 결합된 사를리 테러는 오늘날 프랑스 사회에서 추상적인 보편주의가 사회적 소수를 통합하기보다 배제하는 데 더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더구나 인종, 문화, 종교적 배경과 상관없이 개인의 평등을 보장하던 공화주의적 덕목과 제도가 쇠퇴하고 있는 가운데 개인의 정체성 표현을 억압하는 것은 사회적 소수집단에게 최악의 조합이 될 수 있다. 결국 공화주의의 단선적이고 비타협적인 원칙들은 더 확장된 개념으로 바뀔 필요가 있을 것이다.

김남국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버크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역사적으로 형성된 제도나, 관습, 종교 등이 제공하는 사회 관리의 원칙들을 무시하고, 검증되지 않은 선험적 가치나 추상적인 논리에 따라 세계를 구획하려는 프랑스의 시도는 차이와의 공존을 요구하는 다문화 시대를 맞아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김남국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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