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동안 오키나와에 체류하고 있다. 2월 초순에 온 적은 처음인데, 살을 파고드는 바람의 차가움에 깜짝 놀랐다. 내복을 벗고 온 것을 후회했다. 구름도 짙었다. 일주일 동안 밝은 태양이 명랑하게 빛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올해는 광복 70주년이 되는 해다. 오키나와 현지 역시 일제 말기 태평양전쟁에 동원되었던 학병, 군부, 위안부의 전쟁의 비극이 역사적으로 상기되는 해다. 오키나와 남부 마부니 평화기념공원에 세워져 있는 한국인 위령탑이 설립된 지 올해로써 40주년을 맞는다. 이 비는 어떻게 설립되었을까. 패전 후 미국의 통치하에 있던 오키나와는 1972년 이른바 ‘일본으로의 복귀’가 이루어진다. 그런 가운데 우리가 몰랐던 일제 당시 조선인 위안부 문제가 최초로 발설되었다. 그 주인공은 배봉기. 일제 말기 만주에서 도카시키섬으로 연행되었던 배봉기는 자신이 일제 말기 황군의 위안부였음을 고백한다. 이유는 이런 것이었다. 오키나와가 일본으로 ‘반환’되기 전까지 그는 모국으로의 귀국을 포기하고 미군정과 류큐민정부 아래서 힘겹게 살아왔다. 오키나와 전쟁 직후 미군기지 주변에 창궐했던 풍속업소에서 자신의 과거 전력을 숨긴 채 근근이 생활해왔다고 생전의 그녀는 고백한 바 있다. 하지만 오키나와가 일본으로 반환된 직후 그는 일본 본도에 남아 있던 동포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무국적자’ 신세로 전락한다. 이 사실을 일본 언론이 보도하자, 당시 한국과 체제 대결을 지속했던 북한이 오키나와의 조선인 강제동원 문제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에 자극받은 한국 정부는 오키나와에 한국인 위령탑을 건립할 계획을 세운다. 위령비가 설립된 것은 1975년이었다. 기이한 것은 한국인 위령비를 세우면서도, 가령 전 일본군 위안부 배봉기와 같은 존재에 대해 우리 정부가 체계적인 사실조사를 은폐했다는 것이다. 1965년 박정희 정부는 일본과 외교관계를 재개하고 무상/유상 차관을 일본 정부로부터 받게 되는데, 이것이 일제의 식민지배와 침략 책임을 형식적으로 종결시켜 이후 여러 모순을 낳기에 이른다. 배봉기의 진실이 은폐된 것 역시 그런 까닭이었을 것이다. 일제 말기 배봉기처럼 30대에 오키나와로 강제동원된 위안부도 있었겠지만, 10대의 어린 나이에 오키나와로 연행된 위안부도 있었다. 아직까지 살아 있다면 그분들의 연세는 80대 후반일 것이다. 나는 이들 중 일부가 오키나와든 한국이든 아직도 생존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언론에서 오키나와 관련 뉴스는 현안이 되어 있는 후텐마 기지의 헤노코 이설 문제가 중심이다. 이것은 오키나와인들의 생존과 존엄을 둘러싼 가장 큰 쟁점이다. 그러나 누구도 오키나와 전쟁 당시에 1만여명이 사망했다고 추정되는 조선인 문제에 대해서는 피상적 관심만 갖고 있을 뿐이다. 오키나와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은 국가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다. 오키나와인들에게 일제 말기의 전쟁은 “군대는 주민을 지키지 않는다”는 교훈을 남겼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에게 식민지 체제의 비극과 해방된 조국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일제하에 학병, 군부, 위안부 등으로 강제동원되어 고통을 겪었던 조선인들의 비극을 오늘의 우리 정부는 ‘사실’의 차원에서 과연 명백하게 밝히고 있는가. 오키나와의 한국인 위령비를 둘러싸고도 여러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정체불명의 단체가 오키나와의 위령비를 제주로 이전하겠다는 계획을 추진해 오키나와의 교민들이 강력하게 반발했던 사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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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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