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귀옥 판사의 판결, 훈훈하다. 그는 친구들과 오토바이를 훔쳐 달아난 혐의로 구속 기소된 소녀에게 무거운 형벌 대신에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 등을 따라 외치게 했다. 그는 재판에서 “이 소녀는 가해자로 재판에 왔으나 이렇게 삶이 망가진 것을 알면 누가 가해자라고 말할 수 있겠냐. 이 아이의 잘못에 책임이 있다면 여기에 앉아 있는 여러분과 우리 자신”이라고 했다. 요즘 법조인들이 연일 지면을 장식하며 시민들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상황에서 참으로 인상 깊은 장면이다. 현실에서 갈등을 해결하기 어려울 때 마지막에 호소하는 것이 법이고 재판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법조인들이 서민들의 팍팍한 삶과 절박한 처지를 잘 모르는 것 같다. 법원이 사회정의의 마지막 보루가 아니라 법이라는 이름으로 기득권을 지켜내는 보루로 기능하는 것이 아닌지…. 더욱이 현대판 음서제도라는 비판을 받는 로스쿨이 자리를 잡아가면 이런 경향은 더 강화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로스쿨이 형식적인 특별전형이나 장학금 제도에 안주할 게 아니라 ‘개천’에서 성장한 정의감 있는 인재들을 과감히 선발해야 사회통합도 가능하고, 고인 물에 새로운 물꼬도 틀 수 있지 않을까? 학교의 현실도 마찬가지다. 서울의 초등학교 신입 교사는 ‘강남의 공주님(?)’들이 다수라고 한다. 이들은 대체로 6학년 담임을 맡아서 쩔쩔맨다. 사고 치고 말썽부리는 아이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말썽꾼이었던 경험이 있어야만 그 아이들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기고 그 아이들과 함께 뒹굴 수 있다. ‘개천’에서 자라 교육적 열정은 넘치지만 학력은 조금 부족한 학생들을 교대와 사범대에서 과감히 선발하고, 교원 임용시험에서도 발탁해야 한다. 지난 칼럼에서 우리 사회의 통합력을 높이고 역동성을 되살리려면 ‘개천에서 용이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개천에서 자랐다고 저절로 용이 되는가? 요즘 청문회에서 매번 확인하듯이 그 용들이 자신의 가족이나 친인척, 동창만 챙기는 것 아니냐, 결국 새로운 ‘갑’이 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었다. 그렇다. 현실은 용이 아니라 이무기를 양산하고 있다. 이무기와 용의 차이는 무엇일까? 구렁이가 깨어나고 성장하여 허물을 벗기는 했는데 자신과 주변을 위해 살아가면 이무기요, 자신을 키워낸 개천을 생각하고 공익에 민감한 삶을 살아가면 용이 된다. 그러면 진정 이 시대가 요구하는 용은 어떻게 키워질까? 등용문의 주요한 전제는 개천이다. 따끈한 온천물이나 수영장에서 용이 나오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한부모 밑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아이들, 시골에서 조부모에게 맡겨져 성장하는 아이들, 다문화가정 아이들, 대학에서 ‘기균충’(기회균등선발자), ‘지균충’(지역균형선발자)이라 불리는 아이들. 이들이 바로 ‘용’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요즈음 이들을 사회적 배려 대상자라 부르며 손을 내미는 이들이 많아졌다. 결핍과 열등감에 힘겨운 아이들에게 사회복지 차원의 지원을 넘어 멘토로 다가가는 분들이 많아졌다. 그런데 혹여 이런 도움이 그들을 ‘이무기’에서 ‘용’으로 승천하는 일을 가로막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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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필 전 이우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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