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5.03.15 18:41 수정 : 2015.03.15 18:41

중고등학교 다닐 때 애니메이션을 무척 좋아했다. 느지막이 그 세계에 뛰어들었기에 당시 예닐곱 가지가 있던 애니메이션 잡지 가운데 가장 비싼 것을 골라 매달 샅샅이 읽으며 ‘압축 덕후화’를 추진했다. 공부에도 사회에도 별 관심이 없었던 나에게 애니메이션의 세계는 거의 살아가는 낙 그 자체였다.

그러다가 고3 때 어떤 사건을 맞게 되었다. 소위 ‘연속 유아 유괴살인 사건’이다. 네 명의 어린아이들을 납치해 죽인 이 사건의 범인은 20대 청년이었는데, 그를 통해 일종의 사회문제로 부각된 것이 ‘덕후’(마니아를 일컫는 일본어 ‘오타쿠’를 한국어로 빗댄 말)였다. 티브이에서도 거의 매일 그의 ‘병적인 행태’가 보도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는 거의 외우다시피 하며 애독했던 애니메이션 잡지를 끊었다. 다른 ‘덕후’ 친구들에게도 거리를 두기 시작하고 ‘덕후의 징후’로 보일 만한 것을 내 몸에서 지우려고 애썼다. 이번 주한 미국대사 습격 사건에 관한 언론 보도나 페이스북에 올라오는 반응들을 접하면서 떠오른 것이 이 창피한 기억이었다. 자신도 공격 대상이 될까 봐 친구들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배신했던 기억.

폭력이란 직접적인 물리력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폭력의 예감을 통해 더 큰 효과를 발휘한다. 많은 이들이 김기종씨에게 ‘극단적 민족주의’, ‘정신질환’ 등의 딱지를 붙여가며 자기와 구별하려고 한 것도 닥쳐올 폭력을 예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자꾸 ‘폭력에 반대한다’는, 그것 자체로는 아무 내용도 없는 말을 하게 되는 이유도, 우선은 ‘너도 테러리스트 아니냐’는 권력의 심문에 대한 대응이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이 예감을 떨쳐버리려는 데 있다. 이번 사건을 ‘한-미 동맹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려는 정부와 여당을 비판하며 ‘개인의 돌출행동’으로 규정하려고 하는 행위에는, 우리의 일상이 한-미 동맹, 즉 압도적인 군사적 폭력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는 것이 아닐까? 폭력을 예감하면서도 그것을 애써 외면하려고 할 때, 우리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자기검열을 시작하고 권력의 시선 아래 고독에 빠진다. 홉스의 사회계약론이 보여주듯이, 이 고독이야말로 ‘안전의 수호자’로서 국가권력이 등장하게 되는 바탕이다. 국가권력은 고독과 불신을 먹고 자란다.

이런 의미에서 김기종씨가 휘두른 폭력 역시 고독의 산물이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최근에 그가 빠졌던 ‘독도 민족주의’는 기본적으로 상징 차원에만 존재하기 때문에 사회관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데 특징이 있다. 우파가 이런 민족주의를 즐겨 활용하는 것도 구체적인 사회관계들을 거치지 않고 개인과 국가나 민족을 곧바로 연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독도는 어느 나라 땅이냐’는 답이 정해진 심문이 있을 뿐, 대화도 새로운 관계가 생성되는 여지도 없다. 일본 대사에게 콘크리트 조각을 던지고 미국 대사에게 과도를 휘두르게 만든 것은 바로 이러한 민족주의다. 바꿔야 할 대상으로서 사회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는 남북분단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면서도 그 해법을 상징적인 ‘적’을 공격하는 고독한 행위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실장
지난해에는 한국 사회의 민낯이 여지없이 드러났지만, 올해는 한-미 관계의 정체가 드러나고야 말았다. 광화문과 세브란스병원 앞에서 펼쳐진 ‘쇼’가 보여준 것은 사대주의라기보다 미국이 상징하는 강력한 폭력에 대한 공포심이다. 그들은 아무도 믿지 않기에 절대적인 힘과 자신을 동일시하려고 한다. 한-미 동맹이라는 이름의 군사적 질서는 이런 심성을 길러내고 또 그 심성에 뿌리를 내린다. 이러한 폭력에 대항하는 첫걸음은 그것이 강요하는 고독을 해체하는 일이다.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실장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세상읽기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