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신뢰가 저하하고 있다는 주장이 자주 등장한다. 민주주의의 후퇴는 이미 민주주의 이행과 공고화 과정을 거친 많은 나라들에서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가 가져다주는 삶의 질에 실망한 시민들이 계속되는 민주주의 심화 요구에 지지를 철회하고 있는 현상을 말한다. 이들은 정기적인 선거를 통한 최소한의 절차적 정의만 확보된다면 더 이상 민주주의 문제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경제적 혜택과 안정된 삶의 유지에 신경을 쓰고 이를 위해 심지어 권위주의적인 정부의 등장도 용인하는 태도를 보인다. 민주주의 후퇴가 시민들의 의식과 사회 전체 분위기에 가져오는 부정적인 변화는 무엇보다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민주주의의 규범적 가치들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다는 점이다. 시민들은 문화적 소수자의 유입에 따른 갈등에 대해 배타적인 생각을 갖기 시작하고 사회경제적 약자에 대한 연대의 신념이 약해지면서 다문화적 균열과 경제적 양극화가 민주주의 후퇴를 가져오는 것에 대해 체념하기 시작한다. 이런 현상은 특히 빈부 격차가 커지는 지구적 경제위기 상황을 맞아 심화된다. 최근의 위기 국면에서 정부는 가장 주변적인 집단부터 경제적 혜택의 축소를 시도하고 시민들의 규범적 지지를 잃은 사회적 소수집단은 모든 의사결정 과정에서 우선적으로 배제된다. 시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 철회와 권위주의 귀환 현상의 원인에는 긴 노동시간, 빠른 노동속도, 상시적인 고용불안 등 시민을 정치적으로 탈동원화하고 더는 정치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는 개인으로 만드는 지구적인 무한경쟁의 흐름이 있다. 불안정한 고용에 시달리면서 경쟁을 강요받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기약 없는 정치 참여에 시간을 쏟기보다 권위주의적 정치안정과 가부장적 보호를 선호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구조적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민주주의 위기를 가져오는 이와 같은 시장의 무정부성에 저항하는 방법은 결국 시민들의 강력한 연대와 적극적인 참여를 통한 정치적 통제의 강화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주요 언론과 학자들이 시민의 중요성과 시민사회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구조는 행위자의 선택을 제한하지만 행위자의 누적된 선택에 의해 구조 역시 궁극적으로 변화한다. 고용불안과 경쟁 속에서 개인들의 선택은 제한받지만 시민들이 연대와 참여를 통해 민주적 정부를 수립하고 견제할 때 구조 역시 점진적으로 변화해 갈 것이다. 그러나 시민의 역할에 대한 무조건적 기대에도 함정은 있다. 예컨대 486세대는 민주화 이후의 사회를 이상화하면서 시민으로서 과도한 도덕적 의무를 당연시했고 이 과정에서 사적 개인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와 같은 상황은 곧 민주화 이후의 실망과 단절로 이어졌고 도덕적 과부하와 거대담론의 영향 아래 왜소화되었던 개인들이 정체성 위기와 자기부정에 직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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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국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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