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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4.08 19:31 수정 : 2015.04.08 21:17

올해 4월은 제주에서 맞이했습니다. 제주의 풍경은 언제 봐도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제주의 4월을 마냥 아름답다고만 하긴 어렵습니다. 제주의 4월이 좀 특별하기 때문입니다.

용눈이오름을 거쳐 다랑쉬오름과 아끈다랑쉬오름에 올랐습니다. 작은 굼부리(분화구) 세 개를 품은 용눈이오름의 곡선은 마치 부드러운 물결 같았습니다. 우아했습니다. 다랑쉬오름은 굼부리가 웅장했습니다. 분화구의 깊이는 백록담만큼이나 되고 둘레는 무려 1500m에 이른다 합니다. 그 옆에 나지막이 자리를 잡고 있는 아끈다랑쉬오름에선 허리까지 오는 황금빛 억새들이 온갖 춤을 추며 저를 받아주었습니다.

용눈이오름에서 본 다랑쉬오름
다랑쉬마을은 1948년 11월 무렵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으로 불에 타 사라집니다. 마을 근처의 다랑쉬굴엔 피난민들이 은신하고 있었습니다. 12월18일, 토벌대는 밖에서 불을 피워 이들을 모두 질식사시킵니다. 11명의 희생자 중엔 50대 여성과 아홉살 난 어린이도 있었다고 합니다. 비극의 다랑쉬굴은 1992년에야 발견되는데, 같은 해 현장 조사가 끝나자 봉쇄되고 맙니다. 지금은 모형으로만 남아 어두운 4·3평화기념관 안에 갇혀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을 다랑쉬마을 근처의 오름들이 다 지켜봤을 것입니다. 푯말이 없었다면 학살의 현장이었음을 알지 못했을, 봉쇄된 다랑쉬굴 앞에서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가슴이 저렸습니다. 역사까지 함께 묻힌 듯하여 마음이 더 아팠습니다.

바굼지오름(단산)과 송악산을 거쳐 섯알오름에 올랐습니다. 송악산 서쪽의 알오름이라 해서 섯알오름이라 불리는 이 작은 오름은 일제강점기와 4·3의 상처를 온몸으로 겪었습니다. 주위엔 80만평이나 된다는 알뜨르 비행장 터가 있는데, 일제가 지은 격납고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일제는 섯알오름에 고사포 진지와 탄약고를 만들었고, 해방 후 미군은 이 탄약고를 폭파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8월 섯알오름 탄약고 터에서 예비검속으로 수감됐던 주민 195명이 집단 처형되었습니다. 참혹한 일이었습니다.

섯알오름 학살터
4·3평화기념관에 가보았습니다. 제일 먼저 마주한 건 누워 있는 백비였습니다. 비석이긴 하되 아직 아무 글도 새기지 못해 백비라 한답니다. 무려 반세기 동안 언급조차 할 수 없었던 4·3사건은, 21세기 들어 4·3특별법 제정과 진상조사보고서 채택,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 특별법 개정과 국가추념일 지정 등을 거치며 비로소 역사가 되었습니다.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선 4·3을 ‘(경찰의 발포 사건이 있었던) 1947년 3월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4·3은 여전히 제 이름을 찾지 못한 채 아직 사건으로 남아 있습니다.

윤태웅 고려대 전기전자공학부 교수
4·3의 역사적 평가는 공학자인 제 능력 밖의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미 확인된 사실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인명 피해가 2만5000에서 3만명에 이르며 이 가운데 80% 이상의 희생자가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발생했다는 건 역사적 사실입니다. 아울러 1948년 4월3일 무장봉기 때 동원된 무장대원은 500명을 넘지 않았다 합니다. 2만5000에서 3만 사이의 숫자를 500에 견주면, 4·3이 국가권력의 양민 학살이었음은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습니다. 설령 그 시작이 폭동이었다 해도 말입니다. 4·3은 제주의 비극일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아픈 현대사입니다. 너무도 아름다운 제주의 오름에 서서 제주를 살아낸 모든 분께 경의를 표합니다.

윤태웅 고려대 전기전자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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