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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4.19 18:47 수정 : 2015.04.19 18:47

알프스산맥에 추락한 비행기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사람들은 어린 나이에 숨진 독일 학생들의 청춘을 안타까워하며 명복을 빈다. 그리고 이내 탑승자 가운데 우리나라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안도한다. 내 손가락이 조금 아픈 것은 우리를 며칠 밤 잠 못 이루게 만들지만 먼 이국에서 일어난 참사는 곧 기억에서 사라지고 우리는 잠에 떨어진다.

많은 사람이 희생된 참사에서 나와 같은 국적자의 생존 여부를 먼저 확인하는 일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가장 이성적인 설명은 재분배를 통해 서로의 삶에 개입하며 책임을 나눠 갖는 동료 시민에 대한 관심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관점은 재분배의 사회정의가 이루어지는 현실적인 단위로서 국민국가의 경계가 갖는 도덕적 중요성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논리는 동시에 타인의 불행에 함께 아파하는 우리의 연민이 국경을 쉽게 넘지 못하는 현실도 보여준다. 우리와 문화, 인종, 종교를 달리하며 생활세계를 공유하지 않는 개인의 불행에 대해 연민은 그 물리적 거리를 쉽게 뛰어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경 안에서 일어난 참사에 대해 우리의 연민이 사라지는 현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정치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연민이 발현되기 위해 네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첫째, 상대방의 고통이 충분히 심각한 것이어야 한다. 둘째, 그 고통이 스스로가 아닌 타인에 의해 유발된 것이어야 한다. 셋째, 그 고통이 나의 삶에서도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어야 한다. 넷째, 그 사건이 나의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것이어야 한다. 여기서 유사한 발생 가능성에 대한 판단은 우리가 경험을 공유하지 않는 타인들에게까지 관심을 갖도록 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조건이 충족되어도 연민이 항상 발현되는 것은 아니다. 개인들의 사회계급 차이가 연민의 발현을 위해 필요한 공감을 종종 가로막기 때문이다. 마치 고대의 귀족이 노예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했던 것처럼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가능성이 타인과 질적으로 다르다고 여긴다. 누스바움은 또한 세 개의 병리학적 감정이 연민의 발현을 방해한다고 분석한다. 첫째, 수치심은 자신의 잘못된 감정에 빠져 그가 자신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만든다. 둘째, 질투는 타인의 성취에 눈멀어 타인의 상실과 슬픔에 무감각하게 만든다. 셋째, 혐오감은 우리와 그들을 임의적으로 갈라 그들을 증오하도록 만든다.

물론 연민이 완전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누군가가 연민의 마음을 갖고 있더라도 공정하지 않다면 그는 어떤 일도 하려고 들지 않을 것이다. 그의 이기심이 손해를 보면서까지 남을 돕는 행위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반면 누군가가 완벽하게 공정하지만 연민의 마음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 또한 고통에 빠진 사람을 발견해도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공정할 뿐 연민의 마음이 없어서 타인을 위해 행동할 동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누군가를 돕기 위해서는 공정함과 연민을 동시에 필요로 한다. 즉 이성과 공감이 함께 작용할 때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고 행동하는 도덕적 인간이 될 수 있다.

김남국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그러나 만약 우리를 둘러싼 현실이 연민도 없고 공정함은 더구나 없는 상태로 변해간다면 어떻게 할까? 공정함도 연민도 없이 모두가 오직 생존을 위해 자기 이익만을 좇는 홉스의 자연상태에서 개인은 만인과 투쟁하며 ‘외롭고, 가난하고, 불편하고, 잔인하고, 부족한’ 상태를 견뎌내야 한다. 홉스는 국가가 이 상태에서 우리를 구원해줄 것이라고 믿었지만 우리의 국가는 그런 참사가 나한테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과 진영을 가르는 혐오감에 포위되어 있다.

김남국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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