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은 1894년 이후 두번째로 돌아온 갑오년이었다. 1894년은 동학농민운동이 전개되는 가운데 청일전쟁이 일어난 해다. 이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다. 1895년의 시모노세키 조약을 기점으로 중국과의 조공책봉체제로 존속했던 동아시아적 중세체제는 몰락하고, 그 자리를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이 대신했다. 조선 역시 머지않아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한국의 언론과 학계는 갑오년 2주갑을 맞은 당초에는 이 120년 전의 역사를 치밀하게 복기할 의욕을 보였다. 중국 역시 이 120년의 시간대를 복기하기는 했지만, 상황은 역전된 것이어서 새로운 패권으로 부상할 ‘중국몽’을 구상하고 역설하는 역사의 대회전으로 나아갈 결심을 보였다. 갑오년 2주갑이라는 120년의 시간단위를 통해 한국과 중국이 아시아의 형세를 재인식하고자 했던 것과 달리, 미국과 일본은 전후 70년이라는 시간단위를 중시했다. 1945년 미국의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의 승리와 일본의 패전은 대동아공영권을 대체한, 냉전에 기반한 미국의 패권체제가 구축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일본의 아베 총리는 패전 70년이 되는 2015년을 전후체제로부터 탈피하는 원년으로 삼는다는 목표를 일찍부터 공언했다. 마음 같아서는 헌법 9조를 개헌함으로써 당장에 보통국가로 나아가고 싶었겠지만, 여론이 그것을 반대하니까 내각에서의 해석개헌을 통해 ‘집단적 자위권’을 사실상 허용한다는 식의 위헌적 정치적 도박을 감행했다. 물론 아베의 도박은 재정난에 빠진 미국이 안보비용을 동맹국에 분담하는 과정에서 일본을 핵심 파트너로 해 아시아태평양에서의 중국의 부상을 봉쇄하기 위한 정책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아베의 꿈은 미국의 의도를 넘어 70년 전 전쟁에서의 패배를 재해석하는 데까지 나아갈 것이다. 한국과 중국 등에 대한 침략 책임 역시 제국주의 열강 시대의 흐름을 탄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사죄 등은 불필요하다고 아베는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짧은 인생에서 평범한 보통사람이 120년이랄지 70년이랄지 하는 역사의 시기구분을 통해 오늘의 의미를 묻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 불가피성 때문에 지식인들은 이 시간의 의미를 묻는 것을 직업적 소명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소명의식이 그 자체로 현실의 장에서 힘을 갖는 것은 아니다. 120년이나 70년이라는 역사의 전개 속에서, 현재의 의미를 묻고 외교적으로 치밀하게 대응해야 하는 것은 당연히 정부와 관료들이다. 그런데 오늘의 상황을 보면, 한국의 집권세력은 이 시간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다. 대신 그들은 5년이라는 대선 주기나 4년이라는 총선주기, 재보선과 같은 돌발적 선거주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국의 집권세력은 오직 집권의 연장과 통치의 지속가능성이라는 문제에 골몰한 나머지, 외교적 문제조차도 국내정치용의 정략적 제스처로 처리하거나 침묵하는 방식으로 무책임을 방조하고 있다. 외교적 무능과 전략 부재는 심각한 수준이다. 한국의 외교안보 라인은 오로지 미국의 한국에 대한 ‘암시’만 기대하고 있는 형국이다. 러브콜은 아베가 받고 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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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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