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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5.11 18:37 수정 : 2015.05.12 08:34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10년 전 학교 도서관마다 가장 인기있는 책은 <만화로 읽는 그리스 로마 신화>였다. 학교 도서관을 맡고 있던 나는 수업을 마치고 도서관으로 들어가면 열람실 곳곳에 너덜너덜한 채로 널브러져 있는 그 책들을 챙겨 서가에 다시 꽂는 일부터 해야 했다. 미용실에도, 은행에도, 심지어 고깃집 놀이방에도 그 책은 있었다. 등장인물은 모두 ‘빨래판 복근’의 남자 신들과 울룩불룩한 8등신 미녀인 여자 신들이었는데, 누가 누구인지 분간도 되지 않는 개성 없는 그림들 일색이었다. ‘학습’이라는 대의명분에 ‘그리스 로마 신화’의 아우라를 빌려 와서 대박을 터뜨린, 나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좀 희한한 유행이었다. 아버지가 자식을 잡아먹고, 자식이 아버지를 죽이고, 만나는 여자마다 건드리고 바람을 피우는, 불륜과 치정과 패륜으로 도배가 되는 이 ‘하드코어’가 이렇게 ‘아동 보호’와 ‘윤리’를 생명으로 하는 어린이책 시장의 절대 강자로 등극하고 ‘국민교양도서’가 될 수 있었을까.

그래서 최근 불거진 이른바 ‘잔혹 동시’ 논란이 이해되지 않는다. 문제가 된 ‘학원가기 싫은 날’은 두 번 읽고 세 번 읽으면서 뭔가 처연한 슬픔 같은 것이 느껴졌다. 추운 겨울날, 인간을 위해 가죽 부츠를 남기고 사라진 박쥐와 앙고라 장갑을 남기고 떠난 토끼를 떠올리고(‘겨울 선물’), ‘길들여져 자기가 누군지 잊어버’린 표범의 얼굴에 생겨난 삼각형의 눈물자국을 보며 ‘이제 더 이상 고개를 들 수 없겠네, 무엇이 기억나는지’를 묻는(‘표범’) 마음자리에서 불쑥 솟아오른 저 충동은 무엇일까.

<그리스 로마 신화>를 뒤덮는 치정, 불륜, 패륜과 ‘학원가기 싫은 날’의 충동은 본질적으로 똑같은 ‘인간의 충동’일 뿐이다. 충동을 언어로 드러내는 것과 행위로써 구현하는 것은 다르다. 그것이 신화와 예술의 영역으로 격상되든, 도덕적으로 단죄되어 쓰레기 처분을 받든, 충동은 우리의 인간다움을 구성하는 소중한 한 원천이라는 사실만은 부인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시대에서 예술과 쓰레기는 구분되어 왔지만, 구분의 잣대는 당대 사회의 구성물일 뿐이었으며 근거는 없다. 그러므로 이번 논란에서 문제가 되어야 할 것은 ‘학원가기 싫은 날’이 드러낸 ‘잔혹함’과 그 배면의 ‘윤리’가 아니라, 이 충동을 토로하게 한 ‘현실’이다. 그런데 당사자는 ‘물고기처럼 날고 싶다’며 자살하거나, 스마트폰에 얼굴을 파묻으면서 묵혀 버리기 때문에 당사자 아닌 이들은 ‘아는 척하고’는 있지만 실은 ‘잘 모르는’ 영역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이번 논란의 핵심은 재기 넘치는 상상력과 따뜻한 마음자리에서 불쑥 튀어오른 ‘학원가기 싫은 날’의 비대칭적 맥락이다. 그리고 영어 공부까지 할 수 있도록 영역본을 함께 실어 놓은 출판사의 전략과 ‘학원가기 싫은 날’의 섬뜩한 대조를 그려보는 것도 꽤 의미있을 것이다.

그런데 논란은 엉뚱하게 종결된다. “일부 크리스찬들이 사탄의 영이 지배하는 책이라고 우려한다”며 지은이의 아버지가 시집의 전량 폐기를 받아들이기로 했기 때문이다. ‘사탄의 영’이라는 표현을 이런 데 써도 되는 것일까. 만일 ‘사탄의 영’이라는 게 있다면, 그것이 지금 어디를 지배하고 있는지를 몰라서 열한살 아이의 동시집에 그런 소리들을 하는 것일까. ‘아이다움’이라든지 ‘순진한 동심’ 같은 것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저 어른들이 만들어 아이들에게 강요해온 판타지일 뿐이라는 사실을 정말 모르고 있는 것일까.

이계삼 칼럼니스트
새삼스럽지만, 이 나라 아이들이 처해 있는 현실이야말로 잔혹, 엽기 그 자체다. 청소년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인 이 나라의 현실이야말로 사탄스럽다.

이계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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