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향 마을은 우리 동네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에 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당시에는 70여호에 300명이 넘게 사는 작지 않은 마을이었다. 마을에서 초등학교를 나와 함께 다니던 동급생 친구들은 스무명이나 되었다. 마을회관이나 동구 밖 당산 마당은 아이들이 딱지치기나 구슬치기 등을 하느라 잡초가 돋아날 틈이 없이 반들거렸고 밤에도 아이들은 밖으로 나와 편을 나눠 숨바꼭질을 하기도 했다. 어른들은 농사철이 되면 논을 이웃하고 있는 사람들끼리 함께 어울려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보와 농수로를 손질했다. 또 모내기나, 벼와 보리를 타작하는 것과 같이 많은 일손이 필요한 일들은 같은 골목의 몇 집이 모여 함께 했다. 정월대보름이면 농사의 풍년과 마을의 태평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모시고, 남녀노소가 모여 마을회관에서 시작된 매구굿(매귀굿)은 집집을 돌면서 그 집의 안녕을 빌었다. 그렇지만 온 동네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함께 해내야 했던 것은 혼인과 장례처럼 큰 행사를 치르는 일이었다. 동네에 초상이 나면 마을 사람들은 아무리 바쁜 농사철이라 해도 일을 멈추고 계란 한 꾸러미나 쌀을 한 됫박씩 들고 초상집으로 모여들었다. 남자들은 장례식을 주관할 호상을 뽑고 부고를 만들어 몇 사람이 이웃 동네에 돌리는 한편, 읍내에 나가 상여와 관을 주문하고, 마당에 차일을 치고 돗자리를 깔아 문상객을 맞을 준비를 했다. 그사이 아낙들은 집에서 쓰는 상과 그릇 등 식기를 가져오고, 상복을 짓고, 장을 봐 음식을 장만했다. 이튿날 밤에는 상여꾼들이 모여 망자를 모신 관을 들고 소리꾼을 앞세워 초상집 마당을 돌면서 망자와 유족들을 위로했다. 이 일은 자정 무렵까지 세번씩 치러졌고, 사람들은 술과 음식을 나누면서 슬픔을 함께했다. 동네 아이들이 든 만장을 앞장세운 상여행렬은 당산 앞에 멈춰 노제를 지내고 마을과 사람들과 작별했다. 흙을 파고 잔디를 구해서 무덤을 짓고 그곳에서 점심을 먹은 후 상여틀을 메고 동네로 돌아오는 것으로 사람들 일은 끝났다. 상가에서는 삼우제를 지내고 다시 마을 사람들에게 식사를 대접해서 고마움을 표했다. 장례는 비용과 일손이 워낙 많이 드는 일인지라 어느 마을에서나 이를 공동으로 해결하기 위해 상포계를 조직했다. 옛날에 상복을 짓는 데 필요한 삼베와 무명 같은 포목을 마련하기 위한 비용을 서로 부조하기 위해 지어진 이름인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상여를 멜 만한 사람도 없고 장례식장에서 일을 치르는 바람에 상포계는 마을 사람들의 친목계가 되어버렸다. 읍내에 있는 상엿집은 문을 닫아야 할 형편이라 한다. 40여년이 흐르는 동안 고향 동네에서는 사람이 살지 않아 낡게 된 집이 스무채가 헐려 없어졌다. 또 남아 있는 집도 주인을 잃고 비어 있는 것이 열채가 넘는다. 300이 넘던 주민들은 이제 40을 헤아리기가 버겁다. 초등학생 한명과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 한명이 있어 동네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고 있을 뿐이다. 2, 3일에 한번씩 들르는 동네에서는 들판에서 일하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내가 귀농하던 때만 해도 일손이 모자랄 때 일을 부탁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지만 지금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다. 동네를 가로지르는 길을 지나도 사람 한명 만나지 못할 때가 많다. 한때 1000명이 다니던 초등학교는 지금 전교생이 고작 27명이고 학생보다 교사가 더 많은 중학교는 폐교를 종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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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계수 농부·<순천광장신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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