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의 자살률과 이혼율, 세계 최저의 출산율,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과 학습시간, 세계 최고 수준의 비정규직 비율과 사회적 불평등,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저의 독서율 - 오늘날 한국 사회의 실상을 보여주는 ‘객관적’ 지표들이다. 이러한 지표들은 한국인들이 처해 있는 암울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우리 사회가 인간이 살 수 없는 사회로 변해가고 있음을 증언하고, 우리나라가 망해가고 있음을 경고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경이로운 경제성장과 정치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희망 없는 사회로 추락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해방 이후 지난 70년간 우리 사회가 총체적으로 미국화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미국화된 나라’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종교 등 한국 사회의 모든 영역에 정착된 제도들은 대부분 미국의 제도를 그대로 이식한 것들이고, 한국인의 의식구조, 가치관, 생활방식, 사고방식, 욕망, 무의식까지도 미국인의 그것과 빼닮았다. 한국은 ‘제도의 미국화’와 ‘영혼의 미국화’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미국보다 더 미국적인’ 나라가 되었다. 독일 총리를 지낸 헬무트 슈미트는 “미국은 사회적으로 보면 지옥”이라 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한국 사회는 미국화로 인해 ‘사회적 지옥’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실로 한국 사회는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경쟁이 강요되는 ‘경쟁사회’가 되었고, 세계 최장 시간의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사회’가 되었으며, 인간의 가치가 시장의 논리에 종속되는 ‘시장중심사회’가 되었고, 경제적 양극화가 극단으로 치닫는 ‘불평등사회’가 되었으며, 합리적 사유보다는 종교적 신비적 해결에 의지하는 ‘신앙사회’가 되었고, 진지한 성찰이나 독서 대신 대중문화에 사로잡힌 ‘무성찰사회’가 되었으며,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이 지배하는 ‘정글자본주의’ 사회가 되었다. 한마디로 인간이 존엄한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한 사회가 되었다. 이제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한 시점에 이르렀다. 절망사회를 넘어설 출구를 찾아야 하고, 새로운 대안을 구해야 한다. 제러미 리프킨은 ‘아메리칸드림’의 시대는 끝났고 ‘유러피언드림’의 시대가 열렸다고 했다. 그의 말처럼 이제 우리도 눈을 유럽으로 돌릴 필요가 있다. 유럽은 사회를 운영하고, 인간을 인식하며, 미래를 전망하는 관점이 미국과는 전혀 다른 세계이다. 유럽적 가치는 미국적 가치에 대한 대안으로 형성된 것이다. 유럽적 가치는 무엇보다도 유럽의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생성된 세 가지 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것은 18세기 이래 장구한 유럽 노동운동의 전통에서 나온 연대의 정신, ‘인간은 그 어떤 경우에도 그 자체가 목적이어야지 수단이어서는 안 된다’는 칸트의 정언명령에 기초한 휴머니즘의 정신, 인간 이성의 역능으로 세상을 이해할 수 있고 이상적인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을 견지하는 계몽의 정신이다. 이러한 정신은 개인적 출세와 재화의 획득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 미국식 개인주의, 인간을 시장에 종속시킴으로써 인간 소외를 심화시키는 미국식 시장주의, 신앙을 이성보다 앞세우고 현실의 좌절과 모순을 내세의 구원으로 위무하는 미국식 신비주의에 대한 안티테제를 이룬다.
|
김누리 중앙대 교수, 독문학
|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