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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6.14 20:27 수정 : 2015.06.14 20:27

메르스 사태가 알게 해준 한 가지 현실은 우리의 삶이 생각보다 더 상호의존적이고 불가피하게 운명공동체라는 사실이다. 실망스런 국가, 평소 무관심했던 이웃과 내키지 않는 운명공동체라는 현실을 인정해야 하는 일은 겸연쩍다. 그리고 이 사태를 함께 극복할 운명공동체라고 하기에는 우리가 아주 두터운 연대를 바탕으로 하나의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분명하다. 정체성은 내가 다른 사람과 어떤 공통점과 차이를 갖고 어느 집단에 소속감을 느끼느냐의 문제다. 그것은 선험적으로 주어지기도 하지만 사회적 관계와 우연적 요소에 영향받으면서 변화한다.

현대사회에서 정체성 문제가 중요해진 이유는 민주주의 실현의 전제조건이 되는 사회통합 문제 해결에 실마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근대 국민국가는 동질적인 민족집단을 바탕으로 정체성을 공유함으로써 사회통합의 문제를 해결하였고 문화인종적 연대를 전제로 한 선거를 통해 정치적 정당성 문제를 해결하였다. 한국 사회에서도 지금까지 단일민족에 근거한 민족주의 담론이 서로 경쟁하는 계급이나 지역, 종교 등의 개념을 누르고 한국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핵심적 지위를 차지해왔다. 특히 서로 다른 개인을 묶는 가장 큰 공통분모로서 민족주의 담론이 갖는 패권적 지위는 분단 상황 아래 남북한 경쟁을 통해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세계가 겪고 있는 지구화의 흐름은 한국에서도 민족에 근거한 국가 정체성의 존립을 위협하고 있다. 첫번째 위협은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에 따른 사회경제적 균열로부터 오고, 두번째 위협은 다문화 사회로의 이행에 따른 사회문화적 균열로부터 온다. 이와 같은 두 차원의 균열은 다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대표의 위기와 연대의 위기를 가져오고 있다. 대표의 위기는 사회적 소수의 목소리가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되어 누구에 의해서도 대표되지 않는 현실을 가리키고, 연대의 위기는 사회적 다수와 소수 사이에 충분한 신뢰가 존재하지 않아 안정적인 국가운영이 힘든 상황을 가리킨다.

더 이상 민족의 이름으로 개인들 사이의 커져가는 균열을 포괄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하나의 정체성을 공유할 수 있을까? 한 가지 분명한 방향은 점점 파편화되는 배제의 정치를 넘어서 공간적으로 전국을 아우르는 포괄적인 안건과 누구에게나 적용 가능한 보편적인 가치의 추구를 통해 보람 있는 집단경험을 창출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집단적 자기정체성 형성 과정에서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것은 서로에게 이성적 성찰이 가능한 비판적 거리를 제공하는 장점이 있다. 즉 한국인이 되기 위한 정체성의 조건으로서 혈연에 근거한 민족을 넘어서는 대안을 모색할 때 우리는 감성에 의존하는 생물학적 애착과 이성에 근거하는 합리적 성찰의 균형을 통해 사회적 다수와 소수가 합의할 수 있는 정치적 가치와 원칙들을 찾아내야 한다.

김남국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이렇게 재구성된 사회에서도 여전히 사회정의가 실현되고 재분배가 이루어지는 단위로서 국민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시민들의 헌신과 애국심은 중요하다. 다만 우리의 애국심은 혈연적 민족의 패권적 지위를 위한 것이 아니라 개인 및 집단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귀속적 애착과 합리적 반성의 균형을 통해 생겨난 가치와 원칙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 원칙들은 한국 사회의 민주화가 성취한 개인의 자유와 평등, 법의 지배와 기회의 균등, 관용과 표현의 자유 등일 수 있다. 이익집단의 총합이 아닌 재분배의 윤리적 공동체로서 국가가 해야 하는 역할은 우리가 공유하는 이 정체성이라는 상징적 허구의 힘이 시민들의 서로 다른 이념과 경제적 이해를 뛰어넘게 만드는 데 있다.

김남국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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