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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7.02 18:26 수정 : 2015.07.02 18:26

신경숙 소설가의 표절을 계기로 오랜만에 문학계가 뜨거운 이슈가 됐다. 경청할 만한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그중 흥미로웠던 건 어느 토론회에서 심보선 시인이 던졌다는 말이다. “신경숙은 우리의 에이스가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다른 에이스 혹은 다수의 에이스들을 발굴하고 육성합시다.” 심 시인이 이후 <한겨레21>에 쓴 글에 따르면, 이 발언은 완전히 오해되었다.

그의 의도는 사건을 바라보는 일각의 비평중심적 관점, ‘사실 신경숙은 우리 에이스가 아니니 새 에이스를 찾자’는 식의 태도를 풍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경숙은 에이스가 아니다’ 발언 직후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고 그 순간 ‘개그’는 ‘다큐’로 급반전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한 그는, 기자들에게 자신의 의도를 재차 강조해야 했다. “저는 에이스를 발굴하려는 노력 자체를 반대합니다. 그 에이스가 한명이건 오십명이건.”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심 시인의 이날 발언은 ‘신경숙은 우리 문학 에이스가 아니다’로 정리되고 말았다.

토론회 현장에 있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심 시인이 어떤 뉘앙스로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기자들이 그 정도 골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일제히 오보를 날렸다는 것도 좀 납득하기 어렵다. 발언을 둘러싼 사실관계는 차치하자. 중요한 건 심 시인의 ‘문학 에이스론’이 숙고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저 말은 문단의 폐부를 찌르는 동시에, 사회의 보편적인 문제에 닿아 있다.

심 시인은 한국문학의 비평중심주의를 정면으로 겨냥한다. 그리하여 “한국문학의 발전을 위해 좋은 작가를 발굴하고 작품을 평가하고 담론을 개발해야 한다는 비평적 믿음”을, 에이스와 비에이스를 나누는 “체계화된 구별과 위계의 시스템”이라 규정한다. 통렬하다. 그러나 동시에 공허하다. 과연 비평중심주의가 우리가 직면한 문제의 ‘최종 심급’일까. 그것은 원인이라기보다 오히려 결과가 아닐까. 비평권력은커녕 비평이 조롱의 대상이 되기 일쑤인 영화계에 에이스와 비에이스의 구별이 사라졌는지를 보라. 설령 비평이 전부 소거되더라도 자본은 체계화된 우열 시스템을 어떤 형태로든 가동시킬 것이다.

현실적으로 에이스와 비에이스의 구별이 사라지는 일은 일어나기 어렵다. 그렇다면 관건은 에이스와 비에이스가 ‘어떻게’ 구별되고 생산되느냐는 것이다. 창작과 향유가 선순환하는 구조에서는 크고 작은 에이스들이 자연스레 나타났다 사라진다. 역으로 말하자면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스타를 ‘발명’해야 하고 계속 띄워줘야 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표절과 그에 대한 묵인 같은 부도덕이 일어나기도 한다. ‘만들어진 에이스들’은 스스로를 시스템의 수혜자로 여기는 대신 출판자본과 문학상 심사위원에게 간택받은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하기 쉽고, 그러다 보니 시스템을 개선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기 어렵다. 구조의 기능부전은 그렇게 점점 악화된다. 나쁜 시스템의 문제는 표절 같은 에이스의 일탈에만 있는 게 아니다. 어쩌면 더 끔찍한 건 비에이스들의 삶이다. 이 시스템의 특징은 극도로 협소한 중심부 외에 모든 곳이 주변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중심부엔 젖과 꿀이 흘러넘치지만 주변부는 풀 한포기 없이 황폐하다. 에이스가 될 수도 있었을 비에이스들은 기회를 잡기도 전에 굶어 죽거나 자살한다.

박권일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에이스와 비에이스를 구분하는 방식은 결국 자원을 배분하는 방식이다. 한국 사회의 많은 영역에서 이번 사태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일들이 벌어져왔다는 점에서, 이는 결코 문학의 문제만은 아니다. ‘선택과 집중’, ‘모 아니면 도’, ‘될 놈만 밀어주기’가 생존교리이자 성장서사인 이곳, 슬픈 ‘몰빵’의 공동체여.

박권일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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