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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7.05 18:54 수정 : 2015.07.05 18:54

6월의 마지막 일요일, 서울시청 앞은 그야말로 퀴어(queer)한 공간이었다. 대규모로 치러진 퀴어축제도 그렇지만, 퀴어축제에 반대하며 광장을 에워싼 이들이 보인 모습은, ‘퀴어축제에 가면 퀴어가 된다’는 그들의 주장을 몸소 입증하려는 듯이 아주 퀴어했다. 태극기를 휘날리며 발레, 난타 공연 등등을 선보인 그들의 모습은 외신기자가 축제의 일부로 착각할 정도였으니, 이렇게 반대하는 이들조차 퀴어하게 만들었다는 점이야말로 이번 퀴어축제의 가장 성공적인 부분일지도 모른다. 이날 혐오세력의 일부 사람들은 퀴어에 ‘감염’되었다.

그렇지만 퀴어하게 북 치며 춤춘 이들은 대부분 여성이었고, 앞에서 연설하고 집회를 주도하는 것은 대부분 남성의 몫이었다는 점 또한 중요하다. 항문섹스가 마치 동성애의 본질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동성애를 권리로 인정하게 되면 국방이 무너진다고 주장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이 문제 삼은 대상은 남성 동성애다. 반대집회에는 수많은 여성들이 참여하고 있었지만 그 기본구도는 어디까지나 ‘이성애 남성’ 대 ‘동성애 남성’이었으며, 사실상 거기에 여성의 자리는 없었다. 여성들은 퀴어축제에 대한 맞불의 필요성 때문에, 퀴어축제보다 더 튀는 모습을 누군가 보여주어야 했기에 동원되었을 뿐이다. 서울시청 앞에서 벌어진 퀴어 대결은 흥미로운 현상이었지만,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할 대상은 여성들을 퀴어에 대한 일종의 ‘방역선’으로 삼고 스스로는 뒤로 빠지는 치졸한 남성들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것은 퀴어축제와 반대집회에 동시에 거리를 두면서 ‘제3자적’ 입장에서 평론하는 적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혐오세력의 극단적인 반동성애 행동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면서도 퀴어축제에서 볼 수 있는 ‘지나친 노출’ 등에 대해서 거부감을 드러내는 사람들은 적지 않다. 그들은 소수자가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좀 더 신중해야 한다고 친절하게 조언을 해주기도 하는데, 사실 그 말은 인정받고 싶다면 우리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는 소리다. 이는 혐오세력이 즐겨 쓰는 반대논리 중 하나인 ‘소수자의 인권 주장이 다수자의 인권을 침해한다’는 논리와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런데 왜 폐를 끼치면 안 되는 걸까?

1970년대부터 일본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푸른 잔디 모임’이라는 뇌성마비자단체가 있다. 그들은 뇌성마비자임에 대한 자각을 바탕으로 강렬한 자기주장을 했는데, 행동강령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우리는 문제 해결의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우리는 안이하게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타협의 출발이 되는지 몸소 느껴왔다. 우리는 계속 문제제기를 하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운동이라 믿고 행동한다.” 이런 강령에 따라 이들이 벌인 행동 가운데 하나가 기차역 등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것에 대한 반대였다. 엘리베이터가 설치되면 뇌성마비자를 비롯해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장애인들은 혼자서도 이동할 수 있게 된다. 당연히 환영해야 할 것으로 보이는 이런 조치에 그들이 반대한 이유는, 이를 통해 ‘정상인’들과 장애인들의 어떤 만남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정상인’과 장애인이 함께 산다는 것은 휠체어를 들고 계단을 함께 올라가는 것을 통해 가능해진다고 그들은 보았다. 적극적으로 폐를 끼치는 것을 통해 그들은 이질적인 존재들이 함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강렬한 문제제기를 한 것이다.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실장
퀴어축제에서 볼 수 있었던 어떤 모습은 불쾌감을 불러일으켰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불쾌감이 우리 몸에 새겨진 감각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된다면, 그 불쾌감은 오히려 새로운 사회관계에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서로 폐를 끼치기에 우리는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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