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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밀양시 산외면 희곡리 괴곡마을(골안마을+양리마을) 위(골안마을 쪽)로 운무에 싸인 송전탑이 우뚝하다. 사진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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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나는 오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어느 ‘대단한 집안’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집회에 종종 참여하는 사람이라면 세월호 1주년 집회나 쌍용차 집회에서 밀양송전탑 반대 주민들을 대표하여 기품 있는 명연설로 청중을 사로잡던 초로의 단아한 어르신을 기억할 것이다. 단장면 용회마을 주민 구미현, 지난 4년간 송전탑 싸움 현장에서 함께 풍찬노숙했지만, 살아온 이력이나 집안에 대해서는 몰랐다. 누군가가 독립운동가 집안이라는 이야기를 전해주었지만, 본인은 그런 기색을 일절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던 구미현이 내게 한달여 전 ‘한번 읽어나 보라’며 두툼한 자료뭉치를 주었다. 나는 그 자료를 읽으며 충격을 받았고, 자주 천장을 올려다보며 심호흡을 해야 했다. 구미현의 조부인 일우 구영필 선생은 구한말 영남 보부상 총책이었고, 당시 밀양의 부호였던 한씨 문중과 혼인한 구성백의 맏아들로 1891년 태어났다. 국권 상실 후 구영필의 본가와 외가는 우당 이회영 선생의 일가가 그러했듯 일가 식구 40여명 전원이 만주로 이주하였고,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전 재산을 처분하여 바쳤다. 구영필은 일찍부터 비밀결사 운동에 뛰어들었고, 옥살이 이후 신흥무관학교를 거쳐 대부분 밀양 출신이었던 의열단의 선배 그룹으로 거사에 직간접으로 참여했다. 1919년 상하이(상해) 임시정부의 재무위원과 재무부장을 지냈으며, 만주 지역에서 독립운동가들의 자금을 조달하고 이동의 거점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청산리 싸움 이후 일본군의 보복전이 전개될 때 무장세력은 피신하고, 북만주 지역의 조선인 양민들이 무자비하게 학살당하는 것을 보면서 무장투쟁 일변도의 노선을 회의하게 되었다. 구영필은 길림성 영안현 영고탑 지역에 이주해오는 조선인들을 돌보고, 토지를 개간하여 정착하도록 돕는 자치운동으로 노선을 틀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과 교류하며 학교 설립과 좌익청년단체를 주도하였고, 뒤늦게 이곳으로 자리잡은 김좌진 중심의 우파 민족주의자 그룹인 신민부가 걸어온 주도권 싸움에 휘말렸다. 그는 신민부 보안대원들이 조선인들에게 의무금을 강제 징수하고 폭력까지 행사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고, 갈등 끝에 신민부 보안대장 문우천의 칼에 찔려 절명했다. 그의 아들 구수만 선생은 배재고보를 다니던 1930년, 광주학생운동으로 촉발된 전국적 항일시위의 주모자로 몰려 검거되었다. 이후 조선공산당 영남 지역 대표로 활동했고,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부산항만의 부두노동자 파업을 주도하다 검거되어 끔찍한 고문을 당했지만 지하활동을 이어갔다. 제주 4·3항쟁 당시에는 학살의 진상을 알리는 전단지를 제작하여 배포하다 다시 검거되어 생사를 넘나드는 고문을 당했다. 청년 시절 수차례 이어진 옥살이와 고문으로 육신은 완전히 망가졌고, 40대 이후에는 끝내 실명하고 말았다. 그의 손녀 구미현의 유년 시절은 극빈을 벗어날 수 없었다. 구영필의 독립유공자 서훈은 네 번이나 거부당했다. 그가 피살될 무렵, 말을 타고 집 주변을 밤새 빙빙 돌며 무력으로 시위하던 이가 나중에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족청’의 우두머리이자 히틀러 숭배자이기도 했던 철기 이범석이었다. 1970년대 이후 독립유공자 서훈 심사위원이자 광복회장을 역임하며 수십년간 독립운동사의 ‘판관’ 노릇을 하던 이강훈이 신민부 보안대원이었음을 생각하면 사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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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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