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읽기] 사마천의 오렌지론 / 김남국

사마천의 <사기>에는 춘추시대 월나라 왕 구천이 오왕 부차를 물리치고 패권을 차지하자 월나라의 오랜 신하였던 범려가 구천을 떠나는 이야기가 나온다. 토사구팽의 고사성어를 남기는 바로 그 사람이다. 범려는 그 뒤 송나라에 정착하여 도주공으로 불리며 교역으로 큰돈을 벌고 뒤늦게 막내인 셋째 아들을 낳고 산다. 그러던 어느 날 둘째 아들이 살인죄로 초나라 감옥에 갇히게 되자 그는 셋째 아들을 보내 구하려 했다. 그러나 이를 안 큰아들이 집안의 중요한 일에 당연히 자신이 가야 한다고 주장하여 우여곡절 끝에 결국 큰아들을 보내게 된다.

범려는 길을 떠나는 큰아들에게 편지와 황금을 주며 초나라 현인 장 선생을 찾아가 편지를 전하고 그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빈한한 장 선생의 형편을 본 큰아들은 동생의 석방 여부는 자신에게 맡기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라는 장 선생의 말을 듣지 않고 따로 초나라의 관리들을 만나 동생의 석방을 위해 애쓴다. 얼마 뒤 장 선생은 초나라 왕을 만나 나라의 불길한 징조를 없애기 위해 덕을 베풀 것을 청하고 초나라 왕은 장 선생의 제안을 받아들여 창고를 봉인하고 사면령을 준비한다. 그러자 창고의 봉인을 통해 사면의 징후를 안 관리가 큰아들에게 곧 대사면이 있을 것 같다고 알려줬고 이 소식을 들은 큰아들은 장 선생에게 준 황금 없이도 동생이 나올 수 있었다는 생각에 다시 장 선생을 찾아간다.

애초부터 범려의 부탁을 들어줄 뿐 황금에 관심이 없었던 장 선생은 큰아들에게 황금을 돌려준 뒤 다시 초나라 왕을 만나 최근 시중에 왕의 대사면 준비가 도주공의 아들을 위한 것이라는 소문이 있다고 말하게 되고 그러자 왕은 범려의 둘째 아들을 먼저 사형시킨 다음 대사면령을 내리고 만다. 결국 큰아들은 동생의 주검을 안고 집에 돌아오게 되는데 모든 가족이 슬퍼하는 자리에서 범려는 조용히 웃으며 이미 둘째가 살아 돌아오기 어려울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큰아들이 동생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고생하며 자란 큰아들이 재물을 아끼다가 일을 그르칠 수 있는 것은 당연하며 그래서 풍족한 가운데 어려움 없이 자란 셋째 아들을 보내려고 했다는 것이다.

경험은 중요한 자산이지만 나만의 경험에 근거한 확신이 반드시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민주화 시대의 486세대 역시 과거의 고생과 경험을 바탕으로 정치를 통해 우리 사회를 바꾸기 위해 애썼지만 결과는 아직 만족스럽지 않다. 그 시절에 시대의 아픔도 모르고 이웃의 어려움도 외면한다고 비판받던 풍족한 집안의 오렌지족들이 있었다. 남경필 경기도지사는 같은 당 안에서 아예 대놓고 오렌지족이라고 비판받은 적이 있고, 같은 2세 정치인인 유승민 의원도 여유 있는 집안의 유학파라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이들은 야당과 연합정부를 구성하는 실험을 통해, 또는 민주공화국의 가치와 정의를 지키겠다는 신념으로 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김남국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범중엄의 악양루기(岳陽樓記)에 나오는 ‘세상의 근심을 먼저 걱정하고 세상의 즐거움은 나중에 누린다’(先憂後樂)는 지도자의 마음가짐에 비추어 보자면 오렌지족들은 과거 남보다 먼저 즐기고 가장 나중에 근심하던 사람들이었다. 반면 486세대는 시대의 고민을 어깨에 짊어지고 남보다 늦게 즐거움을 누리던 청년들이었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고 개인들은 또 다른 인생의 경험을 통해 달라졌다. 과거의 오렌지족들은 세상의 근심을 앞장서서 걱정하는 사람이 되었고 486세대는 자신들의 경험에 근거한 근심의 방식이 시대와 맞지 않아 주춤거리고 있다. 이제 자유롭게 자란 범려의 셋째 아들에게 세상을 구할 기대를 거는 시대가 된 것이다.

김남국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