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7.19 18:41
수정 : 2015.07.19 18:41
스레브레니차, 보스니아의 국경마을이다. 비극의 땅이고 유럽의 얼룩이다. 20년 전 세르비아군이 이 마을에 들이닥쳐 무슬림 8000여명을 들판으로 끌고 가 집단학살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벌어진 가장 잔혹한 학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유고슬라비아 내전을 바라보는 국제사회의 시각이 달라졌다. 당시 미국의 클린턴 정부는 ‘인도적 개입’을 선언했고, 유럽도 적극 개입으로 돌아섰다.
지난 7월11일 비극의 현장에서 기념식이 열렸다. 20년 전의 당사자들이 모두 모였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화해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당시 평화유지 책임을 맡았던 네덜란드의 외무장관은 학살을 막지 못한 책임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과했다. 이날의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바로 세르비아의 알렉산다르 부치치 총리였다. 클린턴은 현장에 나타난 그의 용기를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화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추모식에 참석한 보스니아 주민들 중 일부가 세르비아 총리를 향해 돌을 던졌다. 총리는 경호원들에 둘러싸여 황급히 현장을 빠져나갔다. 그는 20년 전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선도한 강경파 중의 강경파였고, 무슬림에 대한 학살을 선동한 당사자다. 부치치가 그날 화해의 미래를 말할 때, 보스니아 주민들은 증오의 과거를 들이밀며 항의했다.
과거와 미래 사이의 틈이 존재했다. 20년이 흘렀지만 집단매장지에서 아직 죽은 자의 정확한 신원조차 정리되지 않았다. 간극을 좁히기 위한 현재의 정치가 중요하다. 세르비아 총리가 보여준 화해의 의지는 다행스럽다. 그날의 전격적인 방문과 더불어 그날 이후 그가 보여준 말과 행동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보스니아를 향해 화해의 손을 거두지 않겠다고 했고, 그 손을 잡아주기를 희망한다고 호소했다. 스레브레니차에 대한 지원도 약속했다. 세르비아의 민족주의 강경파들이 다시 보스니아를 향해 분노를 표현했지만, 총리는 대중의 분노에 올라타지 않고,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겠다고 다짐했다.
7월11일 그날 나는 베오그라드를 거쳐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 도착했다. 전직 교사였던 민박집 할아버지에게 내전의 의미를 물었을 때, 그는 “우린 한때 형제들이었는데, 원수가 되었지”라며 씁쓸하게 말했다. 할아버지는 티토 시절의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그리워했다. 나는 내전이 남긴 상처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잘 안다고 말해주었다. 이별의 악수를 하면서, ‘화해를 위하여’라고 말하자 그 또한 코리아의 화해를 바란다고 화답했다.
사라예보 언덕에 자리잡은 내전 당시 희생자들의 무덤인 코바치 공동묘지에서 다시 화해를 생각했다. 화해는 얼마나 어려운가? 세르비아 총리처럼 혹은 돌을 던진 사람들을 대신하여 사과한 보스니아 총리처럼, 필요에 따라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다. 미래를 위해서, 혹은 공동발전을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피해자 개인의 화해는 다르다. 집단을 위하여 피해자 가족에게 화해를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다.
집단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져도 개인의 깊은 슬픔은 사라지지 않는다. 공동체라면 피해자 가족의 가슴속 어딘가에 얼어붙은 슬픔이 녹아 눈물로 쏟아질 때까지 기다리면서 치유의 노력을 해야 한다. 세월이 약이라고 누가 말했나? 그렇지 않다. 우리 사회를 봐라. 정치인이 공개적으로 증오를 부추기고 혐오범죄가 근절되지 않고 집단 기억조차 부정하려 한다.
|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
광복 70년 무수한 담론들이 넘쳐나는데, 왜 화해는 없는가? 제주에서 광주에서 혹은 거창에서 기억은 엉거주춤 타협하고 화해는 아직 때가 아니라고 한다. 지난 세월이 쌓은 중층의 상처들을 누가 언제 치유할 것인가? 상처가 많은 이 땅에서 치유의 정치를 보고 싶다. 화해를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