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7.22 18:35
수정 : 2015.07.22 18:35
보건을 공부하는지라 좀 낫지 않을까 했지만 나도 마찬가지였다. 수소문해서 환자가 다녀간 병원들을 알아봤고 부모님께는 바깥출입을 삼갈 것을 부탁드렸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데는 피했고 큰 모임은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두어 달 메르스에 대처하는 자세였다.
모두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국가의 부재와 ‘각자도생’. 국립국어원의 사전은 이 말을 “제각기 살아 나갈 방법을 꾀함”이라고 풀이한다. 가끔 쓰이던 말이 어느새 유행어로 굳어졌으니 시대를 상징하는 삶의 원리로 등장했다고 할까.
메르스 대란만 그럴까. 토대에서 사회적 네트워크와 인간관계가 허물어졌으니, 각자도생은 다시 드러난 결과라는 편이 정확하다. 최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더 나은 삶 지수’라는 비교통계를 보자. 늘 비슷한 최하위 등수야 그렇다 치더라도,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긴밀하고 서로 의지할 수 있느냐를 측정한 ‘공동체’란 항목의 결과가 놀랍다.
한국 사람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 의지할 사람이 있는가”를 물었더니 그렇다고 응답한 사람이 72%, 단연 꼴찌다.(초등교육만 마친 경우에는 53%에 지나지 않는다.) 전체 평균이 88%이고, 일등인 아일랜드는 96%라니 차이가 꽤 크다. 10점을 만점으로 각 나라의 점수 분포를 바꾸면 한국은 무려 0점! 다른 나라와 비교해 공동체라 할 만한 것이 없는 사회란 뜻이리라.
각자도생은 개인이 선택한 것이라 하기 어렵다. 메르스 사태에서도 개인은 성숙한 시민의식과 신뢰, 협력을 요구받았다. 그러나 허약한 네트워크에 있지도 않은 공동체의 규범을 지키라고 압박하는 것으로는 완강한 삶의 ‘지혜’를 막을 수 없다. 개인을 그렇게 만든 이유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국가 공동체를 떠받치는 ‘사회적인 것’과 공공성의 고질적인 부재 때문이다. 나와 내 가족의 생명과 안전을 스스로 지킬 수밖에 없는 바로 그 구조! 구조적으로 국가와 공동체로부터 분리되면 각자도생은 자발이 아니라 강요된 것이다.
그래도 각자도생의 원리가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은 역설적인 희망이다. 본래 사람들 사이에서 제기되는 과제를 각자 알아서 해결할 수는 없는 일. 망망대해에서 일어난 재난에, 그리고 ‘인구’ 속에서 빠르게 전파되는 전염병에 개인이 대처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많은 이가 무관치 않은 노인 빈곤과 청년 실업은 또 어떤가. 경쟁과 효율을 으뜸으로 치던 극단주의조차 ‘전향’의 조짐을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리라.
하지만 어떤 변화도 낙관할 수 없다는 것 역시 받아들여야 한다. 각자도생이야말로 이 시기 국가의 ‘통치술’에 완전히 부합한다는 것이 비관의 가장 큰 이유다. 각자가 살아갈 방법을 도모하면 국가가 할 일은 그만큼 줄어든다. 그러다 보면, 그리고 국가의 후퇴에 맞추어 새로운 시대정신이 구축되면, 책임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다. 통치하지 않음으로써 통치하는 것의 효율. 다만, 국가의 안정을 위협하지 않는 범위까지다.
복고적인 공동체, 상상의 네트워크를 회복하자는 것으로 각자도생을 넘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다. 최적화된 통치술을 실천하고 있는 국가가 스스로 뒤돌아서기를, 그리하여 순순히 공공성을 강화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순진하다. 다시 말하지만, 그냥 요청하는 것으로는 되지 않는다.
|
김창엽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시민건강증진연구소 소장
|
영국의 사회학자 힐러리 웨인라이트가 말했다는 방법이 남은 가능성이다. 국가를 (되)찾아야 한다. 어떻게? “신자유주의적 정치 경제의 목표는 정부의 등에서 민중들을 내리게 하는 것”, 즉 각자도생이다. 국가를 되찾기 위해서는 “정부의 등에 다시 올라타는 새로운 방식들을 창조하고, 자원을 통제”해야 한다.
김창엽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시민건강증진연구소 소장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