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8.02 18:35
수정 : 2015.08.02 18:35
10년 전쯤 이야기다.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학적을 유지할 수 있는 연구등록기간도 끝난 무렵,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비자가 곧 만료된다는 연락이 왔다. 학적이 없어졌으니 이제 유학생비자도 끝난다는 것이었다. 행정적으로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자연스럽게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로 떠나야 한다는 게 근본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내가 여기에 존재하면 안 되는 걸까?
납득은 되지 않았지만 일단 ‘불법체류자’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한번 출국했다가 다시 입국한 다음 부랴부랴 혼인신고를 해서 배우자비자를 받았다. 나중에는 영주권까지 얻어서 법적으로는 안정적으로 살 수 있게 되었지만, 국민이 아니라는 이유 하나로 존재 자체를 부정당한 느낌, 그때의 그 억울함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외국인으로 산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언제 그 존재를 부정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일단 그런 불안정한 처지에서 벗어났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외국인들, 특히 이주노동자들은 그런 불안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평소에는 거의 잊고 살지만 나도 이주노동자이기 때문에 올해 6월24일에 대법원에서 나온 판결은 아주 반가운 소식이었다. 2005년에 이주노동자들 스스로가 조직한 노조인 ‘서울경기인천이주노동자노동조합’(이하 이주노조)의 설립신고를 반려한 서울지방노동청의 행위가 위법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서울지방노동청이 노조 설립신고를 반려한 이유는 취업 자격이 없는 외국인이 주된 구성원이기 때문에 노조로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대법원은 근로자성의 인정은 국적이나 취업 자격 유무와는 무관하며 불법체류자라고 하더라도 이미 고용관계에 있는 이상 노조법상의 근로자이기 때문에 노조를 설립하거나 가입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으로 넘어간 지 8년 이상이 지난, 너무나 늦은 판결이긴 했지만, 노동자의 기본적 인권이라고 할 수 있는 노동3권이 모든 이주노동자들에게도 인정된 역사적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 판결 이후 다시 설립신고를 한 이주노조에 대해 서울지방노동청은, 노조 규약에 있는 ‘이주노동자 합법화’, ‘노동허가제 쟁취’가 정부의 노동정책에 반대하는 것이어서 노조 설립의 목적이 정치적 활동에 있다며 아직까지 노조필증을 내주지 않고 있다. 그들은 이주노조가 정치적이라고 하지만, 행정 차원에서 법의 집행을 미루는 이런 짓이 ‘정치적’인 것이고, 나아가서는 어떤 이주노동자들을 불법화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정치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현재 ‘불법’ 상태로 있는 외국인은 대략 20만명 정도인데, 이렇게 많은 ‘불법체류자’가 존재할 수 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한국 자본주의의 최하층을 유지하는 데에 값싼 노동력으로 이주노동자들을 활용하면서도 그들에게 권리를 주지 않으려면 ‘불법’이라는 신분이 가장 유용하기 때문이다. 가끔씩 시행되는 단속도 그들에게 겁을 주는 것이 목적이지 결코 ‘불법체류자’를 없애려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불법체류자’라는 범주 자체가 정치적 계산의 산물인 것이며, 이주노조는 이러한 ‘정치’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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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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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을 정치적 계산의 대상으로 삼는 행위는 인권의 근간을 뒤흔든다. 인권이 지니는 힘의 원천은 그 무조건성에 있기 때문이다. 예외를 인정한 순간, 권리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외국인이 예외가 될 수 있다면, 비정규직이나 다른 어떤 ‘소수자’ 또한 예외가 될 수 있다. 그때그때 정치적 계산에 따라 예외의 범위는 얼마든지 확대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서울노동청 앞에서 노숙농성하는 이주노조가 맞서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예외화이다.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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