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8.09 18:45
수정 : 2015.08.09 18:45
20세기 역사에서 이성의 기획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대표적인 사건은 러시아 혁명과 유럽통합일 것이다. 두 사건은 서로 다른 얼굴을 갖고 있지만 러시아 혁명이 동요하는 시장의 무정부성과 인간의 이기심마저도 계획을 통해 봉쇄할 수 있다고 믿었다면 유럽통합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전쟁 가능성을 제도적인 협력을 통해 봉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유럽통합의 아버지로 불리는 장 모네는 정밀하게 고안된 제도가 잘 작동한다면 역사의 우연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날 유럽통합의 주류를 이루는 이 입장에서 보면 최근 유럽의 위기는 회원국의 재정정책까지 통제하지 못한 불완전한 통합에 있고 따라서 이들의 선택은 더 넓고 깊은 유럽통합의 진전일 것이다.
반면 지금까지 유럽통합이 회원국 사이의 차이를 무시한 채 너무 빠르고 깊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재정적자와 경제정책에서 부담이 되는 일부 국가의 유로존 탈퇴를 포함하여 후퇴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옥스퍼드대학의 얀 지엘론카는 자율과 분권으로 상징되는 신중세 제국을 유럽연합의 모델로 제시하면서 동유럽으로의 경계 확장이 기존의 경직된 체제로는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을 주고 있기 때문에 후퇴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이제 유럽은 수평적이고 다원적인 거버넌스 시대에 맞게 느슨한 국가연합으로서 새로운 민주주의를 모색해야 하고 거대 규모의 위계적인 국민국가 체제를 재생산하는 것은 옳은 해결책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유럽통합을 보는 또 다른 시각으로서 프린스턴대학의 앤드루 모라브칙은 유럽연합의 현재 수준은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 세 나라 지도자가 자신들의 국가 이익을 극대화하는 과정에서 선택한 합리적인 의사 결정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즉 세 나라는 각국의 산업 및 자본가의 이해를 대변하는 경제적 이익을 위해 유럽통합을 선택했고 원활한 협상을 위해 권한을 초국가기구에 위임했을 뿐 결코 장 모네의 연방주의를 향한 비전이나 경제협력의 기능주의적 확산 효과 때문에 유럽통합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유럽연합의 미래는 세 나라의 경제이익이 수렴된다면 유지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후퇴할 것이다.
한편, 민주주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옥스퍼드대학의 래리 시덴톱은 유럽의 민주주의가 기업 경영처럼 소비자 선호를 조작하는 정치 엘리트들 사이의 경쟁으로 축소될 위험에 처해 있다고 비판한다. 유럽연합은 중앙집권화를 추구하면서 대중과 멀어지고 있고 배타적인 경제 용어들의 위세에 눌려 민주적 책임성이나 권한의 분산과 같은 정치적 가치들은 희생되고 있다. 또한 사람들은 시민의 권리보다 경제 성장에 더 관심을 갖는다. 이 입장에서 보면 유럽통합의 속도와 수준을 결정하는 주체는 궁극적으로 정치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해 충분한 연대감을 갖고 나서는 유럽의 시민들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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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국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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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유럽 시민은 아직 존재하지 않거나 그리스의 실패를 공동책임지기 위해 손해를 감수할 만큼의 연대감을 갖지 않는다. 더구나 그리스의 국민투표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긴축 주장이 관철되는 과정을 보면 자본의 힘에 저항하는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확인할 수 있다. 유럽 위기에서 민주주의와 분권이 답이라고 주장했던 근본적 견해보다 영국, 프랑스, 독일의 경제적 이해가 결국 유럽의 앞날을 결정할 것이라는 주장이 현실적으로 더 설명력을 얻고 있는 것이다. 특히 독일의 경제적 이해가 압도적 변수로 등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독일은 1950년대 영국 노동당이 영국의 유럽통합 참여를 반대하면서 했던 주장, 즉 유럽통합 시도가 유럽대륙 자본가의 카르텔 구축을 의미할 뿐이라고 비판했던 바로 그 주장에 답해야 할 시점에 서 있다.
김남국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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