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8.30 18:32
수정 : 2015.08.30 18:32
<구월, 도쿄의 거리에서>라는 책이 번역돼 나왔다. 한국에서도 ‘5월’ 하면 특별한 울림이 있는 것처럼, 이 책은 ‘9월’의 어떤 울림을 들려준다. 지난해 일본에서 출판되어 큰 화제가 된 이 책은 원래 2013년 9월에 블로그에 연재된 글이었는데, 저자가 그토록 고집한 ‘9월’이란 1923년 9월, 즉 간토(관동)대지진 때 벌어진 조선인 학살을 의미한다.
간토대지진 당시의 학살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책이 전하려는 것은 역사적 지식과는 결이 다르다. ‘도쿄의 거리에서’라는 제목에도, 2013년 도쿄의 길거리에서 벌어진 혐한 시위 속에서 1923년 도쿄의 길거리에서 벌어진 학살의 잔향을 듣게 된 저자의 경험이 새겨져 있다. ‘역사’가 더 이상 지나간 ‘과거’가 아니게 되는 순간, 90년이라는 시간의 퇴적으로 덮여 있던 어떤 지층이 드러나는 그 사태를 함께 느끼게 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혐한 시위에서 일제강점기에 사용되던 ‘불령선인’이라는 낱말이 부활한 것처럼, 혐한 시위를 벌이는 이들은 쉽사리 90년이라는 세월을 건너뛰었다. 이에 저자는 스스로도 그 90년을 건너뛰며 거기서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우리를 9월의 거리로 초대한다. 이 책에서 우리는 군이나 경찰만이 아니라 일본의 민중이 얼마나 잔인한 모습을 보였는지 목격하게 된다. 그와 동시에 조선인들을 목숨 걸고 지키거나 학살당한 이의 시신을 수습하고 묘비를 세운 일본인들의 모습도 접하게 된다. 이 책에서 그려지는 많은 장면들 가운데 학살당한 엿장수의 묘비를 세운 일본인 안마사의 이야기는 가장 감동적인 대목이다. 길거리에서 소리만을 매개로 맺어진 그들의 관계는, 시각을 통하지 않는 관계가 지니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 책은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만, 내게 가장 무겁게 다가온 것은 학살을 저지른 평범한 이들이 보인 강한 증오였다. 이 책에는 조선인을 ‘원수’라고 부르면서 학살하(려)는 이들의 모습이 군데군데 나온다. 저자가 학살의 원인을 고찰한 부분에도 지나가는 사람들을 무조건 붙잡고서는 ‘너희가 우리 애를 죽인 거지, 어서 살려내!’ 하고 칼을 들고 외치는 남자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갑자기 가족을 빼앗긴 이들이 지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증오가 학살에 앞서 있었다는 점은 중요하다. 폭동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이 증오의 힘을 두려워했기에 치안당국은 그 힘이 조선인이라는 약자를 향하게 유도했고, 일상 속에서 이미 조선인에 대한 혐오를 가지고 있던 이들은 증오를 혐오로 연결시키며 학살자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증오 자체에는 다른 가능성도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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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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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에 대해 생각할 때, <금요일엔 돌아오렴>에 나오는 한 세월호 유족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결코 남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고 굳게 믿고 착하게만 살다 아들을 빼앗긴 그는, 교황의 미사를 통해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 사람을 미워해도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것이 진실규명을 위한 운동의 원동력이 될 수 있었던 것처럼, 증오에는 혐오와 다른 가능성이 있다. 혐오가 어떤 범주(인종, 민족, 성, 계급 등등)를 통해 작동하는 것과 달리, 증오에는 어떤 개별적 경험에서 비롯되는 구체성과 정리되지 않은 감정을 지닌 신체성이 있다. 아직 무엇이 될지 알 수 없는 증오의 힘을 통제하고 어떤 범주 속에 고정시키는 것이 혐오의 기능이다. 유동적인 관계들과 결부되어 있기에 사랑으로 반전할 수도 있는 증오의 가능성을 혐오는 봉쇄한다. 이를 거꾸로 말하면 어떤 혐오 속에도 증오의 힘이 있다는 말이 될 텐데, 혐오로 굳어진 증오의 힘을 다른 방향으로 풀어낼 수는 없을까. ‘9월의 거리’는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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