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포털에 ‘담뱃값 인상, 결국’이라는 추천검색어가 떴다. 흡연율은 제자리로 돌아가는 동안 세수는 6조원 가까이 늘어난다는 소식 때문이리라. 여러 얼굴을 드러내는 정책이야 흔하지만, 담뱃값 인상은 (일단) 완전히 실패한 건강정책과 크게 성공한 증세 사이에 대비가 선명하다. 처음부터 걱정과 반대가 많았던 것을 기억한다. 어정쩡하게 올려서는 금연효과가 없고 세금 부담만 늘어난다고 했던가. 정부 당국은 다른 금연사업을 열심히 할 것이라며 밀어붙였다. 오늘의 결과는 그 과정에서 준비된 것이다. 그때로 되돌아가 보자. 국회 토론이나 여론조사야 어차피 수박 겉핥기 아니면 정당화를 위한 과정. 언론을 통한 비판도 있었지만, 당사자인 내가 구경꾼 이상이 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가정해서, 공무원연금 비슷하게 여러 당사자가 가담해 격론을 벌였더라면, 그 결과로 더 심사숙고하고 결정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다못해 지금 ‘속았다’는 생각이라도 덜 들지 않을까? 결정을 독과점한 것으로 치면 메르스 사태가 더 심했다. 누가 왜 결정했는지도 모른 채 격리되었던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창구에서 마스크를 쓰지 말라고 일방적으로 지시한 사용자와 그에 따라야 했던 노동자는 어떤가. 중요한 결정을 일언반구 상의도 없이 나는 통보만 받은 셈이다. 고통과 피해의 당사자는 여기 있는데, 나는 잠자코 결정에 따라야 하는 관리 대상이자 구경꾼 신세를 면치 못했다. 흡연과 메르스만 그런 것이 아니다. 건강 문제에는 어느 정도의 일방성과 수동성이 당연하다고들 말한다. 정보가 적고 모르는 것이 많으니 어차피 판단 능력이 모자란다는 것이다. 국가적, 사회적 관리 대상이 되는 문제면 ‘권력’의 불균형은 더욱 심해진다. 담뱃값과 메르스에 (불만이 아닌) 내 의견이 있었던가, 또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던가를 생각해 보자. 이런 효과가 있다니 믿어야 하고 공익과 조직을 위한 일이라니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정말일까,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까. 한마디로 정보와 지식, 고려 범위의 불균형을 전제로 한 ‘보호자주의’는 도전받고 있다. 과정은 그렇다 치더라도 결과까지 나쁘니 더 흔들린다. 담뱃값 인상의 과정과 결과는 물론, 메르스에 대한 대처도 마찬가지. 정부나 전문가만으로는 모든 결정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결정의 결과도 실패했던 예가 흔하다. 병원 정보를 공개하는 결정을 놓고 우왕좌왕했던 일이 대표적인 경우다. 고통스러운 경험이었어도 이제라도 이해하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담뱃값과 메르스에 대한 결정은 의학적인 것이자 또한 사회적인 것이라는 점. 무슨 약이 효과가 있는지도 결정하지만 누가 부담하고 누가 얼마만큼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지도 정해야 했다. 중요한 사회적 가치, 예를 들어 혜택과 비용의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정치의 몫이라면, 여기에도 민주주의가 작동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담뱃값과 메르스 의심자 격리에 참여의 원리가 더해졌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양질의 결정을 했을 것이 틀림없다. 사정을 잘 아는 당사자들이 참여하면 더 빨리 더 좋은 결정을 할 수 있는 것이 당연하다. 스스로 결정 사항을 이해하고 따르는 것, 그리하여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도 이쪽의 가능성이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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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엽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시민건강증진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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