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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9.23 18:36 수정 : 2015.09.23 18:36

청명한 가을입니다. 마지막 학기를 맞이한 대학원생과 지도교수에겐 밀당(밀고 당기기)의 계절이기도 하지요. 학위논문의 구성 내용과 방식을 두고 대학원생과 지도교수가 서로 밀고 당기며 논문을 완성해가는 철이기 때문입니다.

연구는 가보지 못한 미지의 길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좌충우돌의 과정이며, 시행착오도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경험은 연구자들에게 아주 소중합니다. 기대했던 성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그 과정을 통해 많은 걸 배우게 되지요. 사실 과학과 기술의 역사에선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큰 성공으로 이어진 사례를 꽤 찾아볼 수 있습니다. 페니실린이나 엑스(X)선의 발견에도 우연이 개입했고, 붙였다 떼기를 쉽게 반복할 수 있는 포스트잇도 강력 접착제를 연구하다 만들어낸 제품이라 합니다.

논문은 연구 과정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술한 게 아닙니다. 한 가지 주제에 관한 주장을 논리적으로 정당화하며 재구성한 글이지요. 따라서 그 논리적 사슬은 튼튼하게 하고, 거기 엮여 있지 않은 내용은 되도록 뺄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짧게는 2년, 길게는 5년 넘게 공부해온 대학원생으로선 지도교수가 빨간 펜 들고 이 부분은 보강하고 저 부분은 줄이자는 식으로 자꾸 말하면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바로 날 맑고 하늘 높은 가을날 대학원생과 지도교수가 벌이는 밀당의 실체입니다.

연구 결과를 논문으로 구성하는 것과는 독립적으로, 연구 과정을 생생하게 기록하는 일도 매우 중요합니다. 이런 기록을 담은 게 연구노트입니다. 논문으로 발표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하더라도 과정은 늘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학원생들에게 연구노트를 일상적으로 작성하길 권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의도하지 않은 성과도 로또 당첨 같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준비된 연구자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연구노트를 꼼꼼히 적으며 연구 내용을 분석하는 사람들만이 그런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기록의 가치를 거듭 강조하는 건 우리가 지금 기록을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데 사실 우리에겐 찬란한 기록의 역사가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도 자랑할 만하지만, 그 기본 자료이기도 했던 승정원일기는 더 놀랍습니다.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포함한 국정의 이모저모가 거의 실시간으로 기록된 사료라 할 수 있으니까요.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수원 화성을 복원할 수 있었던 것도 성을 쌓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한 모든 과정이 화성성역의궤에 담겨 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연구노트는 연구자들이 효율적으로 소통하는 데도 보탬이 됩니다. 연구자 개인뿐만 아니라 연구기관에도 필수적인 자원임을 뜻하지요. 그러니 국가기관이 국정을 체계적으로 기록하는 것의 중요성은 더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여깁니다. 조선의 왕들은 독대를 꺼렸다 합니다. 승지와 사관이 함께해 대화 내용을 기록하는 게 원칙이었지요. 안타깝게도 이런 기록 문화와 정신은 대한민국으로 잘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고 노무현 대통령만이 재임 중 독대를 전혀 하지 않고, 모든 걸 공적 기록으로 남기려 했을 뿐입니다. 국정원장과의 독대도 없었고, 심지어 비공식 만남에서도 연설기획비서관을 배석시켜 그 이야기를 기록하게 하였다 합니다.

윤태웅 고려대 전기전자공학부 교수
지금은 다시 대통령이 누굴 만나서 어떻게 업무를 보는지조차 명확하지 않은 세상이 된 듯싶습니다. 세월호 참사 당시 대통령은 첫 보고를 받고 나서 구두 지시를 여섯 차례 내렸다고 합니다. 청와대가 밝힌 내용입니다. 그러면서 기록은 없다고 했습니다. 학위논문을 두고 대학원생과 밀당을 벌이다 잠시 상념에 잠겼습니다.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는 세상으로 이들을 내보내야 할 생각에 이르니, 걱정이 앞섭니다.

윤태웅 고려대 전기전자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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