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일이다. 미국발 경제위기 여파가 들이닥치자 한국에도 긴장이 고조되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 지하벙커에서 비상경제대책회의를 이끄는 ‘퍼포먼스’가 연일 언론 지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는 1월15일 “고통분담 차원에서 임금을 안정시켜 실질적으로 고용을 늘리는 ‘잡 셰어링’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한다. 그날 지하벙커 벽에 붙은 현수막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위기를 기회로!” ‘벙커회의’ 한 달 뒤, 30대 그룹 채용담당 임원들이 모두 참석한 ‘고용안정을 위한 재계대책회의’가 열렸다. 글로벌 경제위기에서 우리나라가 결코 예외가 아님이 엄숙하게 선언되었다. 그들은 비장한 표정으로 청년들에게 “고통분담”을 요구했다. 그 자리에서 대졸 신입사원 임금을 최대 28% 삭감한다는 계획이 발표됐다. 그들은 이 계획을 두고 “인턴직원을 더 뽑기 위한 일자리 나누기(job sharing)”라고 설명했다. 말은 좋지만, 잠깐 쓰다 버릴 인턴을 핑계로 정규직 신입사원의 돈을 뜯어가겠단 소리였다. 엄밀히 말해 이것은 노동시간 단축 등을 통해 일자리를 나누는 ‘잡 셰어링’이 아니었다. 임금과 고용안정성을 동시에 악화시키는 노동유연화 기법, ‘일자리 쪼개기’(job splitting)일 뿐이었다. 재벌들이 먼저 나서자 공기업들도 질세라 대졸자 초임 삭감에 나섰다. 끔찍한 야바위가 벌어지고 있음에도 사회적 저항은 미미했다. 노동조합에 가입할 기회조차 없었던 신입사원들은 눈을 빤히 뜬 채 초임의 3분의 1 가까이를 강탈당했다. 그들의 희생은 다른 청년의 일자리로 이어지지도 못했다. 2년 뒤 조사해보니 추가로 창출된 일자리는 대부분 6개월 단기 인턴이었고, 절대다수가 정규직이 되지 못한 채 무참히 잘려나갔다. 결국 대졸 신입사원에게서 빼앗은 돈은 전부 기업 뱃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른바 ‘2009년 대졸 초임 삭감 사태’의 전말이다. 돌아보면 이 사건은 2015년 현재 ‘노동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고 있는 거대한 사기극의 전사(前事)이면서 평행서사였다. 2009년에는 청년세대 신입 노동자가, 2015년에는 장년세대 정규직 노동자가 주된 표적이 됐다. 2009년 사태의 명분은 경제위기와 인턴 일자리였고, 2015년의 명분은 청년세대 일자리다. 최근 몇년간 정부와 재벌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전술은, 상대적 약자를 명분으로 동원해 특정 세대 노동자를 공격하는 ‘세대 저격’이다. ‘노동개혁’의 핵심 중 하나인 임금피크제 주장을 단순화하면 ‘고임금 받는 아버지가 그만두면 아들이 취직할 수 있다’는 논리다. 이른바 세대간 고용대체론이다. 효과만 있다면 한국 아버지들은 아들 세대를 위해 양보할 수도 있을 터이다. 그러나 고용대체론은 오류로 밝혀진 지 오래다. 2005년 발표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신 일자리 전략’ 보고서는, 1980~1990년대 프랑스 등의 나라에서 고용대체론에 입각해 도입된 일자리 정책의 파산을 선언한 바 있다. 애초엔 고령층이 빠지면 그 자리를 청년층이 메울 거라 예상됐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장년층 조기퇴직을 실시한 오이시디 회원국들에서 청년실업률이 높아지는 현상마저 관찰되었다.
|
박권일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