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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10.04 18:42 수정 : 2015.10.04 18:42

헬조선이라는 말도 이제 우리 사회에 정착된 것 같다. 이 헬(hell)이라는 말을 보면서 미국의 활동적 지식인 리베카 솔닛이 쓴 <이 폐허를 응시하라>라는 책이 떠올랐다. 원제가 ‘A Paradise built in Hell’(지옥에서 세워진 낙원)인 이 책은, 그야말로 지옥과 같은 거대 재난 속에서 사람들이 보이는 상호부조적인 모습을 통해 일종의 낙원을, 그의 표현으로는 ‘재난 유토피아’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계엄군에 포위된 광주에서 ‘절대공동체’가 형성된 것처럼, 갑자기 닥쳐온 재난은 오히려 사람들이 즉흥적으로 권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 공동체를 만들어낼 수 있게 만든다. 기성질서 붕괴에 공포를 느끼는 ‘엘리트들’로 인해 금방 파괴되곤 하지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유토피아’는 출현한다. “이 시대의 잠재적 낙원의 문은 지옥 속에 있다”는 저자의 말처럼, 지옥은 우리에게 어떤 기회를 제공한다.

솔닛의 통찰은 우리에게 많은 희망을 안겨주지만 동시에 이런 의문을 갖게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지옥에서는 왜 낙원으로 통하는 문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 우리가 아직도 충분히 지옥에 떨어지지 않아서? 이제 우리는 어마어마한 파국을 기다리며 종말론에 기댈 수밖에 없단 말인가. 그런데 최근에 본 <위로공단>이라는 영화는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됐음을 나에게 가르쳐주었다.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노동운동에 참여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한국 현대사 속의 여성노동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이 영화에는 일반적인 다큐영화에서는 볼 수 없는 장치들이 있다. 영화 포스터의 이미지로도 사용되고, 실제 영화에서도 여성노동자들의 인터뷰 사이사이에 등장하는, 눈을 가린 소녀들의 모습이 그것이다. 영화 속의 소녀들은 다양한 노동현장에서 나온 목소리들에 나를 인도해주는 안내자처럼 보였다. 소녀들은 눈을 가렸기에 소리를 따라 더듬어가며 움직인다. 이 영화를 보는 우리도 그들과 함께 더듬어가면서 그 목소리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깨닫는다. 우리가 살아온, 이제 ‘헬’이라 불리는 이 세상이 하나의 공단임을.

<위로공단>은 우리가 보이지 않는 공단에서 오래전부터 함께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1970년대 ‘공순이’, 2010년대 ‘콜순이’, 그리고 캄보디아 여공들과 함께 우리는 특정 시공간을 넘은 하나의 ‘공단’에 있다. 과거 노동(운동)을 다룬 다큐영화들은 많았지만, 그 대부분은 과거의 특정한 시공간과 현재를 일대일로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위로공단>은 흩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던 노동현장의 목소리들을 한데 모아 ‘역사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았던 ‘공단’을 영화 속에서 만들어냈다. 어떤 시공간을 특정하고 그 속에서 시계열에 따라 사건들을 실증하고 정리하는 것을 기본원칙으로 삼는 ‘역사학’이라는 영역에서는 생각하기도 힘든 ‘반-역사적’ 작업을 해낸 데 대해 부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의 ‘영상미’를 이야기하는 평들은 많고, 실제로 이 영화에 등장하는 영상들은 아름답다. 하지만 이 영화는 듣는 영화다. 영화 마지막에 등장하는 다리를 배경으로 여성노동자의 목소리들이 겹쳐지고 섞이는 장면은, 이들의 투쟁이 이 커다란 공단에서 벌어지는 동맹파업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도 이미 이 동맹파업에 참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지옥 속에서 우리는 먼저 눈을 감아야 한다. 눈을 감아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더듬는 손끝에 감각을 집중시킨다. 그 손이 다른 손을 잡을 때 우리는 보이지 않는 어떤 문을 찾게 될 것이다.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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