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10.05 18:43
수정 : 2015.10.05 18:43
지난 8월23일 페이스북 하루 이용자가 10억명을 넘어섰다. 마크 저커버그는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이 사실을 공개하며 개발 당시 하루 400~500명 정도 이용할 줄 알았던 페이스북이 전세계 7명 중 1명이 접속하는 ‘신세계’로 변모한 것을 두고 ‘놀라운 이정표’라며 자화자찬했다. 그리고 바로 한달 뒤 9월23일, 페이스북이 2시간30분 동안 다운되는 사고가 일어났다. 지난 1일치 <한겨레> 기사를 보니, 사태의 전말은 이러했다. 문제를 자동으로 감지하고 수정하는 시스템이 어느 기술자가 틀린 값을 입력하는 ‘사소한 실수’ 때문에 초당 수십만건의 수정 요청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먹통이 되었고, 결국 시스템 전체를 멈추고 2시간30분 동안 ‘수리’를 해야 했던 것이다.
근대적 산업기술 체제는 ‘수학’에 의해 만들어지고 유지된다. 수학은 모순이 없고, 정답으로 구성된 체제에서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정답 값을 입력하는 일도, 확률적 수치에 대한 판단도 ‘인간’이 수행한다. 당연히 ‘실수’가 일어날 수 있고, 시스템 운용의 의사 결정에 ‘욕망’이 개입할 수 있다. 모든 시스템은 사고를 방어하기 위해 이중 삼중의 방호장치를 두고 있지만, 그것은 상상력과 확률로써 예측 가능한 사고에 국한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고는 상상력과 확률을 넘어선 곳, 곧 예측 가능한 범위를 벗어나는 지점에서 일어난다. 수학은 ‘실수’도 ‘욕망’도 제어할 수 없다.
체르노빌 사고는 핵발전 찬성론자들이 주장하듯 기술과 시스템이 ‘후져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핵발전소는 핵분열을 제어하는 감속재로 엄청난 양의 물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체르노빌 이전까지는 주로 바닷가에 건설되어 왔다. 그런데 체르노빌은 흑연을 감속재로 채택함으로써 핵발전소 보급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던 입지 한계를 돌파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첨단의 체제였다. 그런데 체르노빌의 차석 엔지니어인 아나톨리 댜틀로프는 원자로에 전원 공급이 끊어졌을 때 비상용 디젤발전기가 작동하기까지 걸리는 1분의 시차를 줄이기 위해 전원 출력을 급격하게 조절하는 실험을 했고, 끝내 폭발사고로 이어지고 말았다. 부하들이 반대하는 무리한 실험을 강행한 것은 지역 공산당원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댜틀로프가 실험 업적을 앞세워 수석 엔지니어로 ‘승진’하려는 ‘개인적 욕망’ 때문이었다고 디스커버리 채널은 전하고 있다.
일본의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만년작 <꿈>은 1990년에 제작되었지만, 21년 뒤 일어난 후쿠시마 사고의 ‘예지몽’이 되고 말았다. 옴니버스식으로 구성된 그 작품에서 6, 7번째 에피소드는 핵발전소 폭발 사고를 다루고 있다. 시신더미에서 절규하는 지옥도를 피해 바닷가로 쫓겨간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허둥댄다. 아기를 등에 업은 엄마는 그동안 ‘안전’을 강변한 자들을 향해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며 절규하고, 핵발전 기술자로 설정된 듯한 양복쟁이는 “저도 그 죽일 놈 중의 한명입니다.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남긴 뒤 자살한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할 수 없듯이, 기술을 미워할지언정 기술자를 미워할 수는 없다. 기술이라는 괴물을 키우고 먹여온 우리 모두의 죄업을 덜어내는 길은 기술의 지향 없는 발전에 제한을 가하고, 기술을 자본으로부터 빼앗아 공공적 통제의 품으로 되돌리는 것, 그리고 핵발전 같은 위험천만한 기술을 폐기하는 길밖에 없다.
|
이계삼 칼럼니스트
|
11월11일 우리나라 에너지 정책의 방향을 결정할 중요한 일정이 예고되어 있다. 정부의 경북 영덕 신규 핵발전소 추진에 대한 주민들의 찬반 투표다. 하루에도 수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제어할 수 없는 ‘욕망’에 휘둘리는 한 인간이자 시민으로서, 나는 안전하게 살고 싶다.
이계삼 칼럼니스트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