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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10.12 18:39 수정 : 2015.10.12 18:39

8월초에 모판에 파종한 배추를 20여일이 지나 본밭에 옮겨 심었다. 해거름에 물을 주고 뒷날 아침에 가보니 귀퉁이에 모종 여러 개가 뽑혀 있고 바닥에는 짐승 발자국이 어지럽다. 고라니 짓이다. 산자락 바로 아래 있는 밭이라 봄에 감자를 심었을 때도 멧돼지가 내려와 두둑을 뒤지는 바람에 적잖은 피해를 입었던 곳이다. 어린 배추가 실속 있는 먹잇감이 아닐 듯해서 그러다 말겠거니 했는데, 녀석들의 행패는 계속되어 300평 남짓 되는 밭의 절반을 며칠 만에 망쳐 놓았다.

부랴부랴 밭 가장자리를 빙 둘러 말뚝을 박고 흰 줄을 두세 겹 둘러쳤다. 고라니나 노루는 조심성이 많아 줄이 쳐져 있는 밭은 들어가지 않는다고들 했다. 그리고 녀석들이 싫어한다는 목초액을 물에 타서 배추와 밭 주변에 뿌려 놓았다. 목초액은 나무를 태울 때 나오는 액체를 모아서 정제한 것인데, 짐승들이 그 냄새를 싫어하는 모양이다. 그러한 조처를 취한 뒤에야 고라니는 배추밭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혹시나 하는 조바심에 열흘에 한번꼴로 그 일을 반복해야 했다.

그 배추밭에 인접한 다른 밭에도 배추를 심었는데, 그곳은 애초에 여름무를 심었던 곳이다. 7월초에 10만원을 주고 구입한 무씨를 파종한 후 사흘 만에 싹이 올라오자 비둘기와 까치, 꿩 등 날짐승이 달려들어 모조리 뽑아 먹거나 잘라버렸다. 똑같은 경험을 했던 어떤 농부는 무밭에서 새들이 마치 레저 활동을 즐기는 것 같다고 푸념처럼 얘기했다. 새들 덕분에 어쩔 수 없이 김장배추를 심게 된 것이다. 그 밭에는 다행히 고라니는 들어오지 않았지만 두더지가 유난히 많아 땅속을 뒤지고 다녀서 애를 태웠다. 두더지가 지나는 곳은 배추 뿌리가 땅속에서 떠 있는 모양이 되어 배추가 시들기 때문에 시간 나는 대로 밭에 나가 들떠 있는 흙을 밟아주어야 한다.

올해는 가뭄 또한 매우 심하다. 배추는 모종을 심은 직후에 물을 줘야 하고 생육 기간에는 물론 결구할 때에 특히 많은 물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기간에 비가 오지 않아 스프링클러를 돌리거나 양수기로 물을 퍼야 했다. 스프링클러는 서너 시간 만에 자리를 옮겨줘야 하고 물을 퍼 올리는 경운기에도 때때로 연료를 채워줘야 한다. 산골짜기에서 밤늦은 시간에 혼자 그 일을 하려면 왠지 기분이 찜찜하고 깊은 밤에 밖에 나가는 것도 참 내키지 않는 일이다. 이럴 때는 반딧불이의 몽롱한 불빛도 야속하다. 밑거름해서 밭 갈고, 두둑 쳐서 모종 심고, 김매고 웃거름 주는 일도 벅찬데 밤을 밝혀 물까지 줘야 한다. 그래도 골짜기에는 아직 물이 흐르고 있으니 100년 만의 가뭄으로 농사를 포기하다시피 하고 있는 중부지방의 농부들을 생각하면 호강하는 셈이다.

극심한 가뭄으로 벌써부터 올해 김장 물가를 걱정하는 소리가 나온다. 정부에서는 명절과 김장철에 물가를 잡기 위한 대책을 연례적으로 내놓곤 한다. 올해 김장철에도 그 일이 반복될 듯하다. 그런데 우리 국민은 평균적으로 김치보다 커피를 먹는 횟수가 더 많다고 한다. 조사 자료를 보면 물가 상승에 과일과 채소가 미치는 영향은 매우 미미하다. 도시가구의 소비지출 중에서 농산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낮아 날씨나 계절성 때문에 농산물 가격이 상승한다고 해도 곧 떨어져 물가가 오른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농산물을 물가 상승의 주범으로 취급하고 가격을 통제하려 한다.

김계수 농부·순천광장신문 발행인
배추는 포기마다 농민들의 땀과 눈물, 한숨과 조바심이 배어 있다. 물론 정부 당국자들 눈에 그런 것이 보일 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평범한 서민들의 밥벌이가 갈수록 쉽지 않듯이 배추 또한 심어 놓기만 하면 절로 자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김계수 농부·순천광장신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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