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10.21 18:33
수정 : 2015.10.23 11:28
장미전자의 주가가 곤두박질치기 시작했습니다. 백합전자의 스마트폰을 장미전자가 모방했다는 이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민해 박사는 이 두 회사의 스마트폰이 서로 다른 원리로 설계된 하드웨어라 여겼습니다. 장미전자의 주주이자 정직한 전자공학자인 그는 자신의 고정 칼럼에서 이 문제를 다루기로 하였습니다. 요컨대 이런 상황입니다. ⑴ 고민해 박사는 장미전자 주식을 많이 가지고 있어 무단 복제 논란으로 경제적 피해를 볼 수 있다. ⑵ 그는 자신이 윤리적인 공학자라서 경제적 이해관계를 떠나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고민해 박사는 이 문제가 자신의 경제적 이익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칼럼에서 밝혀야 하는지요? ⑴을 고려하면 그래야 할 것 같고, ⑵를 헤아리면 불필요한 논란을 불러일으키지 않게끔 그리하지 않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고민해 박사는 어찌해야 할까요? 저의 답은 ‘밝혀야 한다’입니다.
왜 그런지 따지기에 앞서, 다음 두 사람을 떠올려보지요. ㈀ “나는 객관적으로 판단하려 애를 쓰고 있고, 실제로 항상 객관적이다.” ㈁ “나는 객관적으로 판단하려 애를 쓰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편향될 수 있음을 인정한다.” ㈀처럼 자기확신이 강한 사람을 먼저 신뢰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과 같은 사람의 이야기에 저는 더욱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자기도 모르게 편향될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 그걸 경계하는 게 더 성찰적인 자세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의도하지 않은 편향은 예외라기보다는 일상에서 무의식적으로 늘 일어나는 일입니다.
스마트폰 복제 논란으로 돌아가 보지요. 고민해 박사는 장미전자가 백합전자 제품을 베끼지 않았다는 판단에 객관적으로 이르렀(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그 판단이 경제적 이해관계로 말미암아 무의식적으로 편향되었을 가능성도 함께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 이유로 그는 자신이 장미전자의 주주라는 사실을 칼럼에서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칼럼의 결론이 정말로 객관적인지는 독자의 몫이 될 터입니다.
이렇듯 (객관적 진리의 탐구와 같은) 1차적인 목적이 (개인의 경제적 이익과 같은) 2차적인 이해관계와 충돌하는 문제를 ‘이해충돌’이라 합니다. 국가대항 축구경기에서 제3국 사람한테 심판을 맡기듯 아예 피할 수 있는 이해충돌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사실 흔치 않습니다. 세상이 너무 좁은 탓에 어떤 형태로든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키는 게 일반적이지요. 그러니 이해충돌의 존재 자체를 잘못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건, 1차적인 목적이 훼손되지 않도록 이해충돌을 잘 관리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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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웅 고려대 전기전자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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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세상읽기’에 나온 김종엽 교수의 칼럼을 눈여겨봤습니다. ‘표절과 자비의 원칙’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신경숙 작가와 창비를 비판하는 이들에게 이른바 ‘자비의 원칙’을 주문했습니다. 여러 논란을 떠나 제가 주목한 논점은 이해충돌이었습니다. 자신이 창비의 편집위원임을 김 교수가 밝히지 않았던 까닭입니다. 한국의 전문가 사회가 이해충돌에 둔감한 편이라 생각해왔기에, 이참에 좀 짚고 넘어가야겠다 싶었습니다. 그러다 <허핑턴 포스트>에 다시 실린 그의 글에선 글쓴이가 창비의 편집위원이라는 사실이 필자 프로필에 명기돼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김 교수도 이해충돌의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다는 뜻이겠지요. 다만, ‘세상읽기’처럼 프로필이 따로 붙지 않는 지면의 경우엔 본문에서라도 이해관계를 밝히는 게 바람직하리라 여겼습니다. 의도하지 않은 편향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충돌할지도 모를 이해관계를 모두 공개하는 것’이 이해충돌을 관리하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윤태웅 고려대 전기전자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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