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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11.19 19:03 수정 : 2015.11.19 19:03

일면식도 없었다. 몇 해 전 필자와 삽화가로 작은 지면을 공유했을 뿐이다. 지면을 떠나며 나는 차츰 그녀의 존재를 잊었다. 지난주, 참으로 오랜만에 근황을 들었다. 그녀가 이 세계에 부재한다는 소식이었다. 일러스트레이터 난나씨 이야기다.

자살이라고 했다. 먼 곳을 여행하던 나는 그녀의 삶이 담긴 <한겨레>기사를 읽고 또 읽었다. 가슴속에서 어떤 감정이 격하게 소용돌이쳤다. 분명 슬픔이었으되 가족이나 친구의 죽음이 주는 서럽고 그리운 애달픔과는 달랐다. 같은 공간에서 부대끼던 타자의 부재를 깨달을 때 밀려오는 슬픔은 곧 상실감이다. 이 감정은 함께 나눈 추억에 정박되어 있다. 하지만 난나씨의 부고를 보며 느낀 감정은 과거지향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건 차라리 일종의 ‘예감’이었다. 언젠가 나도 저렇게 죽어가겠구나, 하는 서늘한 예감.

공식적인 직장생활을 제하고 따져보니 나는 7년차 프리랜서다. 난나씨는 거의 내 두 배가 넘는 기간 동안 프리랜서였다. 오래 일했을 뿐 아니라 “삽화가로 정점을 찍은” 최고의 일러스트레이터였다. 게다가 성실했다. 죽기 직전까지도 그 주의 그림을 완성해 넘겼고, 혹시나 싶어 지인에게 담당 기자 연락처까지 적어주었다. 난나씨의 이런 꼼꼼한 면모는 내 칼럼에 삽화를 그리던 시절 주고받은 이메일들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조금이라도 일정에 차질이 빚어질 우려가 생기면 그녀는 여지없이 이메일을 보내 체크하곤 했다.

글값이 그런 것처럼 그림값도 벌써 수십년째 제자리다. 그림만으로는 생활이 되지 않아 난나씨는 논술학원 강사를 해야 했다.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지속가능한 삶을 영위하는 롤모델이 없다는 사실에 그녀는 늘 괴로워했다고 한다. 그만큼 업계가 열악하단 것이겠지만 난나씨가 사실상 개척자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마 후배 일러스트레이터들에게는 그녀가 롤모델이 아니었을까. ‘88만원 세대’ 같은 말로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칼럼니스트가 되고 싶다던 고등학생들과 대학생들이 떠올랐다. 그들도 롤모델이란 말을 했다. 내 대답은 한결같았다. 당신들의 롤모델도 글만으로 먹고살지는 못한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지 않고선 못 견디겠다면, 정 그렇다면 시작해 보라고. 하지만 나는 온전히 솔직하지 못했다. 속으로 있는 힘을 다해 이렇게 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 돼! 뒤도 보지 말고 도망쳐!”

난나씨는 긍지 높은 사람이었다. 마감을 강박적으로 챙기던 직업윤리, 생계에 곤란을 겪으면서도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기대지 않았던 점을 봐도 알 수 있다. ‘을 중의 을’이라는 일러스트레이터의 삶을 그토록 오래 지속한 원동력의 하나는 그녀의 꼬장꼬장한 자긍심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미래에 대한 희망도 있었을 게다. 좀더 열심히 노력하면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며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기대, 그것이 또 하나의 버팀목이었으리라. 그러나 빈곤은 인간의 긍지와 희망을 좀먹어 들어가다가 끝내는 영혼을 집어삼킨다. 버티고 버티다가 툭, 하고 실이 끊어지는 순간이 온다. 존엄한 삶을 위해 악전고투하던 인간일수록 죽음으로 자기 삶의 마지막 존엄을 지키려 할 가능성이 높다.

박권일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다수 시민의 존엄한 삶이 불가능한 사회에서, 자살은 그 자체로 존엄사다. 한국의 자살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이유는 신체의 통증이나 절대적 빈곤 때문이 아니다. 인간의 존엄이 훼손되고 있어서다. 사회 모든 영역에 만연한 ‘갑질’, 승자독식 구조가 만들어낸 극단적 경쟁문화 등이 인간이 인간을 혐오하고 멸시하게 만드는 것이다. 존엄사 권하는 이 체제를 하루빨리 존엄사시키자. 체제의 존엄이 아닌 우리 각자의 존엄을 위해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박권일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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