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12.13 18:45
수정 : 2015.12.13 18:45
“형식이 내용을 결정한다.” 2013년 6월 박근혜 정부가 회담 대표의 격이 맞지 않는다고 남북 장관급 회담을 결렬시키면서 했던 말이다. 이후 우여곡절을 거쳐 돌고 돌아 어렵게 성사된 남북회담이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다. 과도하게 형식에 집착한 ‘잘못 끼운 첫 단추’의 예정된 실패다.
지난주 북한이 차관급 회담의 명단을 통보하면서 아무런 직책 표기도 없이 ‘북측 단장 전종수’라고 보냈다. 격 논란을 피해가겠다는 의도였다. 공식적인 남북회담에서 아무런 직책을 표기하지 않고 명단을 통보한 적은 없다. 차관급도 형식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일반적으로 차관급 회담은 실무회담이다. 실무회담을 위해 실무접촉을 했다는 말인데, 처음 보는 해괴한 풍경이다. 이 또한 ‘장관급’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대한 남북한의 인식 차이를 우회하기 위한 편법이었다.
과연 남북회담에서 형식이 그렇게 중요할까? 회담 과정을 보면 왜 회담의 형식을 그렇게 고집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이틀 동안 회담이 열렸지만, 실제로 대화를 한 시간은 3시간이 안 된다. 잠깐 만나고 오래 휴회하는 것이 최근 벌어진 남북회담의 익숙한 풍경이다.
회담 첫날, 첫번째 수석대표 접촉은 30분 만에 끝났다. 그 뜻은 각자 기조연설을 했는데, 아무런 질문도 없이 그냥 헤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7시간 동안 휴회했다. 회담 대표가 질문할 재량권도 없단 말인가? 지난 8월의 고위급 접촉에서도 몇십분 만나고 몇시간 기다리는 것이 반복되었다. 과거처럼 청와대 회의를 통해 훈령이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대통령을 제외하고 누구도 결정권이 없으니, 그야말로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러니 과장급이든 차관급이든 장관급이든 무슨 의미가 있을까?
형식에 집착하는 사람은 대부분 내용이 부실하다. 내용적으로 무엇을 얻을 것인가에 대한 판단은 상대편의 의도 분석에서 출발한다. 북한이 한번 더 실무회담을 하자고 한 것은 남측의 의지를 판단하기 위해서였다. 북한의 협상 전략은 이미 몇번이나 확인되었지만, 이산가족을 금강산 관광과 연계하겠다는 것이다. 남측이 금강산 관광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지 않으면 이산가족 상봉을 할 수 없다는 것은 회담 전부터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는 금강산 관광은 어렵고 이산가족 상봉만 하자고 제안했다.
어떻게 이루어진 회담인가? 우리 정부가 세번이나 장관급 회담을 열자고 요청했다. 이미 실무접촉 과정에서 양측의 입장을 확인했다. 회담을 제안했으면 최소한 현재의 교착을 타개할 해법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이 정도의 제안이라면 회담 결렬은 예정되어 있었다. 나머지 의제는 말할 필요도 없다. 당장의 현안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그보다 어려운 의제를 어떻게 논의하겠는가?
내용이 없으면 형식도 존재할 수 없다. 대통령이 외국 정상과의 회담에서 통일을 말하면, 상대편은 물을 것이다. ‘당신들은 통일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느냐’고. 그래서 남북회담의 형식이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쇼는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상대편도 쇼가 필요해야 하는데, 북한은 더 이상 장단을 맞추어줄 것 같지 않다. 8월 이후 조성된 짧은 대화 국면은 이제 원래의 긴 경색 국면으로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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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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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은 폭력의 영역이지 협상의 덕목은 아니다. 먹을 것 없는 잔치에 꽹과리 소리만 요란했다. 다시 회담 결렬의 책임을 상대에 떠넘기고 그런 과정이 불신을 증폭하고 관계를 경색시킬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갈 것이다. 언젠가 다시 회담할 때가 오면, 그때 이 말만은 잊지 말기를 바란다. “내용이 형식을 결정한다.”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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