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12.17 18:58
수정 : 2015.12.18 15:13
미국 국방장관이었던 도널드 럼스펠드는 이라크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기상천외한 수사적 곡예를 구사하곤 했다. 그중에서 1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심심찮게 인용되는 표현이 있다. ‘알려지지 않은 무지’(unknown unknowns)가 그것이다. 먼저 럼스펠드는 앎의 세 유형을 제시한다. 첫째는 ‘알려진 앎’(known knowns)이다. 글자 그대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지식이다. 둘째는 ‘알려진 무지’(known unknowns)다. 이는 우리가 어떤 문제에 무지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셋째가 바로 ‘알려지지 않은 무지’다. 이 무지는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모르는 무지다. 또는 어떤 문제에 대해 안다고 착각하지만 실은 모르고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알려지지 않은 무지’는 세 유형 중 제일 위험하다. 문제를 의식조차 못할 경우 잠재된 문제가 불거지는 것을 예측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미 발생한 뒤에도 적절히 대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 50개주 대선 결과 예측을 모두 적중시키며 스타가 된 통계 전문가 네이트 실버가 <신호와 소음>에서 강조한 위험도 ‘알려지지 않은 무지’였다. 그는 2008년 금융위기에 관해 설명하면서 “신용평가회사들의 그릇된 자신감이 금융권 전체를 물들였다”고 비판한다. 또한 “어떤 것을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 상황”이 사태를 일파만파 키웠다고 지적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럼스펠드가 말한 ‘앎의 유형론’엔 기이한 공백이 있다. 굳이 매트릭스를 그려보지 않더라도 한 가지 경우가 빠져 있다는 걸 금방 알 수 있다. ‘알려지지 않은 앎’(unknown knowns), 즉 ‘알지만 알지 못하는 것’ 말이다. 형식논리로 보면 분명 모순이지만 실은 이것이야말로 가장 문제적인 유형이라 할 수 있다. ‘누락’을 간파한 사람들이 물론 없지 않았다. 다큐멘터리 <언노운 노운>을 만든 영화감독 에롤 모리스, 철학자 지제크 등은 ‘럼스펠드가 말하지 않은 것’을 끄집어내 분석했던 이들이다.
‘알지만 알지 못하는’ 사람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도처에 존재한다. 처음에 그는 현실주의자였다. “뭐가 옳은지는 알지만 어쩔 수 없잖아, 현실이 그런걸.” 이런 태도가 지속되다 보면, 시시비비에 대한 앎 자체가 점점 불편해진다. 그리하여 현실주의자는 불가지론자가 된다. “이 복잡한 세상에서 뭐가 옳고 뭐가 그른지 누가 확신할 수 있겠어?” 조금 편해지긴 했지만 이내 불가지론자는 더 안온한 자리가 있음을 깨닫는다. ‘백치’다. 세계의 비참이 주는 불안과 공포를 피하기 위하여, 개인은 급기야 자기 자신을 향해 “가만히 있으라” 명령한다. 의도적 무지를 택한 그는 비로소 충만한 행복을 느낀다. 웃자고 하는 얘기에 죽자고 달려드는 이들에게 “진지충”이니 “선비질”이니 놀려먹는 것도 즐겁다. 이 백치에게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나 윤리적 가치를 가르치고 역설하는 건 무망한 노릇이다. 그는 계몽되지 못한 자가 아니라 계몽되지 않으려는 자, ‘계몽 이후의 백치’인 까닭이다.
|
박권일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
그는 세상이 고통받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음을 알면서도 그런 사실을 모르는 양 태연하다. 자신이 비정규직으로 착취당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실제 비정규직을 양산한 주체인 국가와 자본에 저항하지 않는다. 대신 엉뚱한 대상, 이를테면 “김치녀”, 정규직 노조, 전라도 사람, 이자스민 의원을 공격한다. 계몽 이후의 백치들이 앎으로부터 도피해 다다른 곳은 누구에게도 선동되지 않고 누구도 선동할 수 없는 고요한 바닷가다. 곧 알게 될 것이다. 거기가 각자의 세월호라는 것을.
박권일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