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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12.27 18:44 수정 : 2015.12.27 18:44

최근에 기회가 있어 <숭고한 나치>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봤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1933년에 나치가 자행한 분서 장면, 불길 속으로 책을 던지는 소년의 해맑은 표정이었다. ‘반독일적’인 것으로 지목된 책들을 불태워버리는 ‘야만적 행위’를 저지르고 있는 소년의 표정은 결코 증오로 가득 찬 일그러진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밝은 웃음을 띠고 있었다. 이 웃음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지난 한 달 동안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의 필자가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사태와 관련해 세 개의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일본에서 발표된 ‘박유하 교수 기소에 대한 항의성명’(11월26일)과 한국에서 발표된 ‘<제국의 위안부>의 형사 기소에 대한 지식인 성명’(12월2일)은 둘 다 이 기소가 ‘오해’에 의한 것임을 강조한다. 검찰의 기소가 “박유하 교수의 의도를 있는 그대로 정확히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선입견과 오해에 의거”한 것이라고 보거나 “검찰이 과연 문제의 책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책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기소가 이루어졌다는 논리는 당연히 이 책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전제로 한다. 그런데 텍스트의 최종적 해석권이 저자에게 있지 않다는 것은 이 성명서에 서명한 이들도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그렇다면 검찰이나 ‘위안부’ 피해자들은 ‘오해’한 책을 어떻게 그들은 ‘정확히’ 읽을 수 있었을까?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학문’이라고 불리는 해석공동체의 문제일 것이다. ‘지식인 성명’이라는 제목이 보여주듯이, 그들이 해석권을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까닭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배운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위치에서 말하고 있기에 그들의 말은 사회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 성명서는 검찰을 비롯한 국가권력의 개입으로부터 ‘학문의 자유’를 지키려고 하지만, 그 ‘학문의 자유’는 ‘위안부’ 피해자들을 포함한 ‘못 배운 사람들’을 미리 배제한 위계적 구조 위에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연구자와 활동가’ 명의로 발표된 ‘<제국의 위안부>사태에 대한 입장’(12월9일)이라는 성명서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판단을 존중하는 입장을 보였다는 점에서 이런 위계적 구조에 대해 훨씬 자각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성명서 역시 “학문적인 논의 속에서 해결”할 것을 주장하며 “연구자들이 주체가 되는” 논의의 장을 마련할 것을 제안한다. 이 성명서의 주체는 ‘활동가’이기도 한데, 왜 그들은 논의의 주체가 될 수 없는 걸까? 그리고 무엇이 ‘학문적인’ 것인지 누가 어떻게 정하는가?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은 ‘위안부 문제’라는 결코 학문적이지만은 않은 문제에 개입한 책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 책에 대한 반응 역시 학문적이지 않을 수 있다. 이 성명서가 발표된 자리에서 한 ‘위안부’ 피해자가 말했다는 “지식의 자유가 있다고 해서 함부로 말해도 되냐”는 질문을 통해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지식인의 윤리와 같은 문제라기보다는 ‘지식’이나 ‘학문’의 경계선 자체일 것이다.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지금 고등학생에게 교과서나 참고서를 불살라버릴 기회가 주어진다면, 기꺼이 참여하는 학생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학문이라는 것이 제도화된 권위로 존재하는 한, 그런 권위에 대한 반발이 생기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나치의 분서는 분명 학문의 자유를 짓밟는 것이었지만, 그 학문을 짓밟는 행위 속에는 해방을 향한 열망 또한 잠재되어 있다. 폭력적일 수도 있는 이런 열망에 대해 ‘학문의 자유’가 방패막이가 된다면, 거기에 있는 것은 ‘그들의 자유’뿐이다.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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